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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정부연구소다운 연구, 나라가 원하는 연구에 집중하자"


KIST 전 원장 금동화 박사 "출연연,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7월의 어느 날,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원장 문길주) 경내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녹색의 싱그러운 모습이었다. 잘 정돈된 거리를 따라 걷다 연못을 지나자 어느덧 금동화 전 원장이 있는 연구소까지 발길이 닿았다.

금동화 박사는 제20대 KIST 원장으로 취임한 후, 인력, 조직, 연구영역 및 운영시스템 전반에 혁신적인 개선을 추진했다. 핵심역량 구축에도 성과를 올렸다. 지인들은 평소 그를 '격 없는 사람', '선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원장으로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 하기 위해 때로는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도 했다. 금동화 박사를 만나 KIST에 대한 그의 생각과 애정을 들어 보았다.


처음 KIST에 오셨을 때 기억하시나요. 어떤 느낌이었나요?

"KIST에 온 이후 본원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어요. 연구비 확보나 지원 등 KIST의 연구지원제도는, 미국 제도에 미흡하지만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훌륭했죠. 다른 기관에서는 연구에 필요한 재료나 장비를 연구자가 직접 구입해야하는데, KIST는 행정부서에서 모든 걸 해결해 줬어요. 다른 기관이 우리의 행정제도나 지원제도를 모방해갈 정도로 좋았죠. 물론 지금도 높은 수준의 연구 환경을 유지하고 있고요."


박사님은 전 원장님답게 여전히 KIST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요즘은 과학기술계의 연구 성과가 너무 저조하다는 목소리도 있는데요. 오래간 KIST에서 연구해온 분으로서 연구 성과에 대한 사회의 요구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과학기술계에 있는 한 연구 성과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투자한 만큼 성과를 내야 하죠. 하지만 연구비 투자를 기업에서 생산을 위해 투자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하는 태도는 적절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연구 성과가 쉽게 나오지 않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외국 선진국과 비교해 연구개발 역사가 짧기 때문에 선진국의 기술을 배워서 개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누적한 연구 성과를 단숨에 따라잡긴 쉽지 않죠. 두 번째 이유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사회의 요구도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쉬운 과제는 거의 다 해결되고, 이제는 어려운 과제만 남아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투자 활동에 비해 생산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일본 정부가 한 해 과학기술연구개발 분야에 투자하는 정도는 우리의 약5배에 달합니다. 투자가 누적돼야 성과가 나오는 것이라는 특성을 고려할 때, 지금 과학기술 성과를 평가하는 시각은 분모를 계산하지 않고 분자만 보는 격이에요. 과학기술은 결과만 보기보단 투자량을 분모에 고려해 판단해야 합니다."


일반 대중의 인식을 과학화하기 위해 어떤 방안이 있을까요?


"과학기술계는 국민들에게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뚜렷한 성장률과 정확한 판단 기준을 알려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외국에서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투자 대비 성과가 높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기술의 성과를 논문, 특허, 기술이전만을 기준으로 평가해요. 외국의 경우, 인력양성, 인프라 구축, 제도 개선과 연구문화 정착 등도 성과를 판단하죠. 우리의 평가 기준은 너무 수치화하는 부분에만 치우쳐 있어요.

KIST에는 직원은 600여명인데 대학원 학생이 1000여 명에 달합니다. 연구 환경이 좋다보니 각 대학에 있는 학생들이 KIST에 와서 연구하면서 학위논문을 쓰고 성장하죠. 이 또한 인력양성에 크게 기여했고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지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정부는 G7선도기술개발사업을 시작해 HD TV, 고속전철, 디스플레이 등의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엔 실패한 정책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엔 그 분야가 먹을거리 산업과 기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예를 들어, 1992년에 신의약·신농약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현재 바이오산업의 발전은 있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큰 성과에는 그 기반을 닦고 성장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해요."


과학발전을 위해선 대중들의 관심도 중요한데, 흔히 과학은 어렵다는 인식이 강해서 관심을 기울이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과학을 쉽게 알릴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도 쉽게 과학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네요. 우리 선조 중에는 정약용, 정약전 등 유학자이자 과학자의 삶을 살았던 분들이 있어요.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분들이었죠. 외국의 경우, Harold Varmus라는 노벨상 수상자는 암 퇴치 연구를 하기 전엔 영문학 전공이었어요. 문학을 한 사람이 과학 연구를 하다보니 전문과학지식도 쉽게 전달하더군요.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해부학, 수학, 물리학뿐 아니라 물감도 자신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 쓸 정도로 다양한 재능이 있었죠. 그 능력들이 합쳐져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과학자에게 많은 능력을 요구하기 보다는, 과학지식을 대중과 연결해 주는 역할을 전문영역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해요. 과학자에게는 무엇보다 연구를 깊이 하는 게 우선이고, 그러다 보면 일반인에게 쉽게 설명하라고 강요하긴 어렵기 때문이죠.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은 점점 전문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Scientific American'은 비전문가를 위한 과학저널이에요. 우리나라에는 '과학 동아', '과학과 기술' 등이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어렵다'의 저자 임재춘,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등 전문과학지식전달자가 있죠. 앞으로 이 분야를 더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해요."


2006년도에 KIST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특별히 발전시키고자 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이전까지 KIST가 안고 있던 몇 가지 특성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어요. 먼저, '정부연구소다운' 연구를 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정부연구소는, 대학처럼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에 집중하기 보다는, 국가적인 과제(National Agenda)에 집중해야 합니다. 국방이나 환경, 에너지, 복지, 안전 등 우리나라의 미래 산업을 위한 연구를 해야 하죠. 예를 들면,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등 국민에게 큰 손실을 미치는 바이러스 전염과 같은 분야도 애초에 연구하고 대비했어야 했어요. 이런 연구들은 규모가 크고 기간도 오래 걸리고 복잡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기보다 연구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제1호 국가과학자로 선정된 신희섭 박사와 같이 국제적인 수준을 갖춘 팀이 국내에 5팀만 있어도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강소연구소를 만들자는 것도 같은 이치에요. 정말 잘 할 수 있고 하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거죠. 원장으로 취임한 후 뇌과학, 에너지 연료전지, 로봇 등 세 개 분야에 집중적으로 지원해서 이 팀이 국제적으로 아류는 될 수 있도록 COE(center of excellence)로 키우는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집중하다 보면 소외되는 분야는 물론 있지만, 연구자들은 반드시 자기가 전공한 분야의 연구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부 연구소가 모여서 여럿이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려면, 인접 연구 분야와 같이 연구하면서 넓은 시야를 갖게 되고 균형감 있게 연구할 수 있어요.

또한, KIST가 '선행연구'를 하는 기관으로 전통을 이어가는데 노력을 했습니다. 일단 KIST가 하면 다른 연구원에 미치는 파급력이 상당합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전례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실패가 생길 확률이 높죠. 하지만 그 실수마저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데이터가 됩니다. 우리가 먼저 연구해서 시행착오가 생길 경우, 그 실패 사례를 다른 기관에도 알리는 등 새로운 분야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하는 '미래융합연구소'를 열어 바이오닉스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데 일조했죠.

하지만 3년은 아쉬움이 참 많이 남는 기간이더군요. 특히 연구자들이 품질, 대형과제, 장기과제를 위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충분히 마련해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또 1999년부터 만연해진 상재평가 평가 제도를 품질 위주로 바꾸려 노력했는데, 자리 잡지 못했어요. 아직 후진성향의 평가제도하에서 연구원들은 새로운 분야에 대해 도전하기 주저하고 논문을 내는데 급급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연구원들이 대형이나 장기 연구과제에도 집중할 수 있도록 보다 유연한 평가지표를 만드는 등 적절한 연구 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KIST 원장직에서 퇴임한 이후 개인적인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원장직에 대해서는 그 역할을 맡았을 때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 전부였어요. 이제 제 임무는 끝났죠. 잠시 빌렸던 원장이란 직책을 내려놓은 지도 벌써 1년 반이나 됐네요. 그동안 과총과 공학한림원 등 다른 과학 분야에서 주어진 일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과학기술계에 중요한 오피니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역할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구원들과 기회가 될 때마다 발전적인 연구 방향을 상담해주는 등 젊은 연구원들에게 짧지 않은 동안 과학기술계에서 지내며 느꼈던 바를 전하고 있어요. 연구소 운영 경험을 지금의 조직에 잘 이용할 수 있도록 조직에 남아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경험을 전파하고 있죠."


옥천이 고향이시죠. 정지용 시인의 출생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혹시 고향의 인문학적 기운을 받아 유달리 과학과 인문학의 연계에 뜻이 있으신 건 아니신지요?

"주변으로부터 '왜 저 사람이 과학기술계에 있을까?' 라는 평가를 받는 등 다소 의외라는 이야기를 듣긴 해요. 집안 자체에도 인문적 성향이 많은데 저만 이공계에 진학했죠. 그렇다고 해서 유달리 과학과 인문학의 연계를 실현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전문과학지식을 담은 책을 최대한 쉽고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연구자의 삶을 언제까지 지속할 계획이신가요. 어떤 노후를 보내고 싶으신가요?


"지금도 굉장히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테크노닥터'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본인이 가진 전문성을 제공하면서 최소한의 경비만 받는 NPO(non profit organization) 활동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로 연구자들이 퇴직 후에 적극적으로 자기 전문성을 이용해 퇴직 후 보람된 생활을 하는 사례와 분위기를 형성하고 싶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미래 방향 설정에서 어떤 점이 중요할까요. KIST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제시해 주시죠.

"연구자들은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나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제(national agenda)를 고민하는 게 가장 우선입니다. 개인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고 싶은 만큼만'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연구를 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안보, 에너지, 환경, 복지, 안전 등 당위성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나아가 구체적으로는 그 분야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원천기술을 준비하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정부는 이렇듯 열심히 나라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들의 처우를 보장해줘야 합니다. 단편적인 예로, 공항이나 학부형 직업란에 보면 '연구원'이라는 선택 항목은 없어요. 정년연장이나 노후보장, 연금 등 연구원들의 생활에 관한 제도가 매우 미비합니다. 이러한 점이 개선되어야 활발한 연구 성과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금동화 박사는 누구?

금동화 박사는 2006년 제20대 원장으로 취임한 뒤, '미래 국가연구소의 선도적 모델구축'을 위해 인력, 조직, 연구영역과 운영시스템의 혁신적 개선을 추진했다. 또한 핵심역량을 구축하고, 목적 지향적 연구로 전문화와 특성화를 추진했으며 연구부문의 조직을 개편했다.

이러한 다각적 노력의 결과 2006년 제1호 국가과학자에 신희섭 박사를 탄생시켰으며, 계속해서 21세기 과학기술의 꿈과 미래를 상징하는 연구소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