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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과학기술 중심은 과학기술 친화적인 환경을 찾아 이동한다"


효율적인 기술혁신 체제 구축을 위해 대학-연구원-산업체, '릴레이 연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GDP 80달러 시대에서 GDP 2만 달러 시대 과학기술의 변천을 몸소 겪어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시대 발전에 따라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엄청난 변혁을 가져왔지요. 그중에서도 KIST는 GDP 80달러 시대에 설립돼 산업화시대를 이끌어온 우리나라 근대 과학기술의 요람이고, 그 속에서 젊음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라 할 수 있지요."

- 채영복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응용화학연구부 부장



채영복 박사는 1937년 일제 치하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태어나 젊은 날 과학도의 길을 택했다. 70대 중반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는 우리나라 과학 발전을 위해 한 평생을 보내왔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제까지나 '연구원'이라는 이름을 지키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여전히 연구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채 박사는 서울대학교와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막스플랑크 연구소 연구원과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연구원 생활을 지냈다. 이후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준공되자 초창기 멤버로 입소해 유기화학 연구실 실장으로 국내 연구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울산석유화학 단지가 출범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생산되는 업스트림 제품들로부터 부가가치가 높은 다운스트림 제품들을 개발해내는 일이 주어졌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정밀화학'이란 개념을 도입해 이 분야 산업과 우리나라 화학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상지학원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채영복 박사를 만나 대한민국 과학 기술의 태동기였던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기 시절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과학기술 발전사를 들어보았다. 나아가 한국 과학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원장 문길주) 설립은 한국 과학기술의 태동기이자 박사님께서 KIST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시기다. 당시 KIST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상황은 어땠나?

"KIST에 입소한 1969년은 막 KIST 연구동이 완공되어 준공식을 가질 무렵이었다. 그 당시는 약 20명 해외의 유치과학자들이 연구실을 꾸미기 시작하던 초창기였으며, 우리나라 어느 기업도 제대로 된 연구소나 연구시설을 가추고 있지 못한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KIST는 우리나라 모든 산업체의 연구소였으며, 그 역할을 해야 했다. 나 역시 우리나라 유기화학관련 기업들의 공동 연구실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대학과 연구소를 통 털어도 박사급 인력이 손꼽을 정도였고 많은 대학 교수들이 유학을 떠나던 시절이었다.

초대 KIST소장이시던 최형섭 박사는 미국이나 유럽 등을 돌며 해외우수과학자를 국내로 유치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해외에 체류 중인 과학자들에게 '당신이 노벨상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대로 외국에 머물러 있으시오. 그러나 국가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다면 나를 따라 귀국해주시오'라고 호소했고 실제로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이에 호응해 귀국했다.  

지금도 같은 추세이지만 당시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선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드는 '브레인 드레인' 현상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시기였는데, 우리나라는 이러한 노력으로 '역 브레인 드레인' 현상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이는 외국 언론의 주목을 끄는 중요한 성과로 지목되기도 했다. 물론 그 배경엔 KIST연구원들에 대한 정부나 사회의 깊은 애착과 배려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자립하지 못한 채 외국 원조에 의존해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상황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기술을 통해 자립경제를 이룩하겠다는 '기술입국'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젊은이들은 '자립경제'를 갈망하던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수출 산업의 3총사는 와이셔츠, 가발 그리고 합판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기술을 개발해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하고 수출함으로서 '자립경제'를 이루려는 것은 당시 국가지도자의 당연한 염원이기도 했을 것이다.

때마침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선물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연구소 설립을 선물로 받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GDP 80불의 최 빈곤국에 수천만 불이 투자해 최첨단 시설을 갖춘 연구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지금 봐도 그 당시의 이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었고 대단한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어느 기업도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던 시기라 그렇게 엄청난 원조와 국력을 투자해 설립된 KIST는 자연히 대한민국 모든 기업의 연구소가 됐다. 또 어느 기업이든 용역연구를 통해 활용할 수 있는 만인의 연구소가 됐다. 머릿속에 든 지식은 대가 없이 나누어주는 일이 미덕이던 그 시절 '기술을 판다', '연구용역' 등 낯선 개념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머리를 파는 일, '연구 용역' 과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KIST 연구개발실을 맡고 있던 최종완 박사, 훗날 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한바 있는 그가 연구용역 업무로 기차여행을 하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기차 안에 마주앉아 있던 어느 노인이 최 박사에게 "선생은 뭐하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최 박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나는 머리(브레인)를 팔러 다니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노인은 곧 "아! 가발을 팔러 다니는 가발 장수구먼"이라고 하더란다. 당시 가발 수출이 한창 인기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한국 과학의 미래를 짊어진 초창기 KIST연구원들은 그 책임감도 상당했을 것 같다. 연구원들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나?

"초창기 KIST를 이끌던 책임연구원들은 대개가 미국 등 해외대학에서 강의를 하든가 연구생활을 하던 20~30대 젊은이들이었다. 실제 산업발전의 현장에서 기획하고 연구하던 경험을 지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이들 앞에 국가 차원의 큰 규모의 프로젝트 기획업무가 떨어지자 거기에 따르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훗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제철, 선박, 기계, 자동차 특수강 등 핵심 산업들의 청사진이 기획됐다. 그 기획이 산업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나라 산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아마도 그런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그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초창기 멤버들 중 많은 분들이 암으로 사망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KIST에 들어오기 전과 후의 마음가짐은 어떻게 달라졌나?

"KIST 연구원으로 일하기 전에는 독일과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 시절을 보냈으며 연구소에서 학자의 꿈을 품고 내공을 쌓던 시기를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입소한 KIST에서는 그동안 축적된 지식을 풀며 봉사하며 살던 시기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10년 동안 쌓아온 학문의 세계를 저버려야하는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사회발전에 직접 기여를 할 수 있는 응용 개발 연구생활에 나름대로 큰 보람과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가끔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인 영빈관으로 연구원들을 초청해 연예인들과 더불어 연회를 열고 격려해 주기도 했다. 연구원들을 직접 회의에 참석시켜 전문가의 식견을 듣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 같으면 소장이 직접 참석해 의사전달을 하려 했을법한 일들도 최형섭 소장은 본인이 참석하기 보다는 전문가가 직접 참여토록 강권했다. 이는 보다 정확히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도 되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연구자들을 신뢰하고 존중했던 배려에서 비롯된 사례들 중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최근에 어느 연구소 연구원은 장관의 허락 없이 연구결과를 가지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하여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크게 대조가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외국에서 학업을 마친 후 현지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는데,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59년 막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당시 새로 출범한 원자력원의 '연구요원 양성 유학생 선발 프로그램'에 합격하는 기회를 얻었다. 외국유학이란 좀처럼 꿈조차 꾸기 힘들었던 시기에 2년 간 유학을 국비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원자력 연구소의 출범 초기였던 당시 2년으로 예정됐던 해외 파견이 한해 두해 연장됐고, 결국 10년이라는 세월을 외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때를 회상하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이 많았다. 우선 외국 유학에 필요한 여권부터 환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대행했으며 집까지 배달해 줬다. 병역 문제도 자연히 연기됐다.

그 당시는 6.25 직후 몇 년이 채 안 되던 때라 아마 GNP도 50~60불 내외가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하루는 반 년분 유학비 1500불을 여행자 수표로 만들어 경무대 직원이 집에 들고 온 적도 있었다. 아마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 돈을 혹시 유학길에 분실할까봐 어머니는 내 내의 속에 겹 주머니를 꿰매 그 속에 넣어주셨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그 후 10년 동안 학업을 마친 후 두 분의 노벨상 수상자를 모시고 공동연구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는 학자로서 꿈을 키우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귀국해서 봉사해야 할 본분은 까마득하게 망각한 채 오로지 학문세계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는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장면, 박정희로 정권이 바뀌며 어지러운 정권교체 시기가 이어졌고, 급기야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인의 기강대로 다스려지는 시기가 왔다. 더 이상의 외국체류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국가에서 받은 혜택에 보답해야 하는 의무를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고 택한 곳이 KIST다. 그 후 나는 나름대로 국가에서 내게 베풀어준 혜택에 보은하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여러 과정을 거쳐 KIST 연구원이 됐다. 뜻을 두고 있던 기초학문에서 응용과학연구에 집중하게 됐는데, 당시 몰입한 연구 분야는 무엇인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연구소를 망라해 외국에서 하던 연구를 계속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KIST는 기초연구가 아닌 산업화를 위한 응용연구가 주된 연구소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그동안 공을 쌓아온 기초학문을 뒤로하고 응용연구로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아픔이 없지 않았다,

당시 울산에는 갓 준공된 석유화학공단이 가동되는 중이였으며, 내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서 나오는 제품을 이용해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들로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이들 중에는 의약품원료, 염료, 농약 등 다양한 제품들이 포함돼 있었고, 대부분은 국내에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어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외국의 독과점으로 국내에서 제품의 가격은 실제 생산가보다 월등히 높았다. 따라서 이들 제품을 생산하게 됐는데, 국내 시장규모는 작았지만 이윤의 폭이 컸던 관계로 국산화에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이들 제품의 품목이 너무 다양하고 조금 생산하는 품목이라 정부의 육성정책을 끌어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해결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이들 다양한 제품들을 하나의 군으로 묶어 '정밀화학'이라 명명하고, 이 제품군에 대한 육성정책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정밀화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연유다.

이렇게 해서 이 부분의 산업은 국가의 육성정책 하에 승승장구 호황을 누리며 급격히 성장했다. 그리고 KIST의 이 분야 용역도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KIST에 와서 연구용역을 거친 품목은 마치 특허를 얻은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는데, 당시 KIST 외에 국내에서 이와 같은 기술개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KIST에서 개발된 품목은 국내에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에 즉시 수입금지로 이어질 수 있었고, 독과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토록 국산화 연구가 활기를 띨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외자도입심의회'를 통한 국내기술의 보호제도 때문이기도 했다. 자국의 기술을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관련 생산제품의 수입을 금지시킴으로써 기술개발자의 혜택을 주는 제도였다. 우리나라 초기 산업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정책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정책이 기업의 연구투자 의욕을 고취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 연구소의 당면 문제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가.

"연구소는 항상 사회발전의 선두에 서야 한다.  연구소는 사회발전을 견인하는 위치에 서 있어야 비로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지난날 IBM의 경우 연구소가 5년에 한번 틀이 확 바뀔 정도로 구조 조정을 했다고 한다. 연구소가 구조조정을 두 번 거치는 동안  IBM의 비즈니스 모델이 바뀌어 버렸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IBM 연구소는 지금도 미래를 내다보는 GTO (Global Technology Outlook)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고 글로벌한 차원에서 동원 가능한 석학들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비즈니스를 견인하고 있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우리나라 연구소의 진화 속도는 사회의 진화보다 빨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어 안타깝다. 이는 연구소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함께 내포돼 있다. 업스트림인 정부정책과 다운스트림인 연구소 운영방향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기술혁신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업스트림의 정부정책 당국자는 다운스트림 기술 진보의 디테일을 이해해야 하는데 여기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다운스트림 기술진보의 디테일을 잘 아는 연구소 관리자들은 그 의견을 정부에 전달하고 소통하는데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연구비의 배정 문제나 오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야 할 연구결과를 '하루아침에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으로 채근해 연구 분위기를 흐려버리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경제학자 로머는 '메타 아이디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메타 아이디어가 잘 조성된 곳으로 과학기술의 중심이 옮겨간다고 했다. 메타 아이디어라는 개념은 창의적인 아이디어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책이나 환경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실제로 과거 18~19세기에 과학기술의 중심이 프랑스에서 영국, 그 후 미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정책당국의 몫일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원활한 지식의 흐름'이다. 국가의 기술혁신 시스템은 세 가지 요소로 구분된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공공부문이다. 특히 대학 등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기능, 이를 이용해 기술혁신으로 이끌어 내는 산업 클러스터, 그리고 이 양자를 연계해 지식의 흐름에 교량 역활을 담당하는 무문이 그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기술혁신의 효율성 저하를 이들 간의 지식 흐름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 세 주체 사이에는 지식을 창출하는 대학이나 공공부문에서 산업클러스터로 향하는 지식의 흐름을 저해하는 필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릴레이 선수들이 바통을 잘 연계해 순차적으로 뛰는 작업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고, 축구 시합에서 수비수와 링커, 전방의 공격수 간에 작전이 잘 이뤄지도록 조화를 이뤄야 하는 예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다른 쪽을 배려하며 자기 본분을 지켜야 하는데 만일 모두가 다 수비수가 되어 버리거나 모두가 다 공격수가 되어 버리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 연구체제는 어떤 쪽일까. 모든 과학기술자들이 함께 고민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