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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STORY/KIST 소식(행사·연구성과)

[창의포럼 후기] 여성산악인 오은선의 꿈과 도전

2016년 10월 창의포럼에서는 한국 산악 등반 역사를 새로 쓴 철의 여인 ‘오은선’ 여성 산악회 회장을 초청했다. 155cm 자그마한 체구에 방금 미용실을 다녀온듯한 파마머리, 똘망똘망한 눈, 흰색셔츠와 검은색 바바리 코트를 입고 우리앞에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전 절대로 단상뒤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키가 작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 말문을 열었다. 아래는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한 내용이다.

 

< 이야기를 시작하며 .... >
왜소한 체구는 산을 오르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안이 들어와도 강연을 수락하지 않는데 KIST 강연은 아주 영광스럽고 기쁜마음으로 왔다. 나의 등반사진을 보며 시기별로 순차적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
진달래 따 먹고, 물장구 치며 뒷동산에 오르던 소녀는 초등학교 3학년때 서울 면목동으로 올라와 가족과 함께 산, 들, 바다로 여행을 즐겼다. 5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멀리서 북한산의 바위(인수봉)를 보며 검은 점(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줄을 잡고 올라가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어른이 되면 꼭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산악부에 가입하다.... >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남녀반이 따로 있어 여학생들하고만 지내다가 대학교에서 가서 드디어 남녀학생들과 생활하게 되었다. 암벽등반하는 것을 보면 오금을 저려하던 나는 선배의 권유로 산악부에 가입하여 처음 산행을 갔다. 산악부에서 하는일은 거의 암벽등반이었다. 암벽등반이 두려워서 하루종일 텐트만 지키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암벽 등반을 마치고 돌아온 동료들은 힘들고 지쳐 보이지만 무언가 좋은 에너지와 기운이 느껴졌다. 나도 그 좋은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암벽등반에 필요한 기초를 배우고 인수봉에 올라가 보니 너무 좋아 내려올때는 펄쩍펄쩍 뛰어내려 왔다. 이렇게 나의 산행은 시작되었다. 그때의 그 소녀가 나중에 히말라야도 가고, 지금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 히말라야의 이해 >
히말라야는 아시는바와 같이 산맥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8천미터 이상의 봉우리가 14개 있고 위성봉까지 합하면 20개가 넘는다. 엄홍길 선배는 위성봉도 인정해야 한다며 2봉을 더하여 16좌를 완봉했다. 8천~7천미터 이상의 봉우리는 오로지 히말라야에만 수백 봉우리가 있다. 히말라야를 제외하고 제일 높은 봉은 남미 아콘카우가가 6,950m이다. 히말라야는 7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들이 전부 모여있는 유일한 산맥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14개 봉우리는 네팔, 부탄, 티벳, 파키스탄, 인도에 걸쳐져 있다.

 

< 과거와 현재의 등반 환경 >
14개 봉우리중 우리 인간에게 가장 먼저 정상을 허락한 곳은 안나푸르나다. 나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정복한 봉우리지만 1950년 모리스에리조그팀이 처음으로 정복에 성공했다. 안나프르나를 가는데 가장 빠른 곳은 네팔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네팔은 문호가 개방되지 않아 티벳, 인도, 파키스탄 쪽으로 돌아서 들어가야했다. 베이스캠프만 가는데도 몇 달이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네팔이 문호를 개방하여 프랑스에서 최초로 올라가지만 장비, 의류 등이 열악하여 동상 등 부상도 많이 입었다. 영광보다는 아픔이 크지만 고통을 영광으로 감수할 부분이다. 그 당시의 산행후 사진을 보면 유명한 등반가 ‘헤르만불’은 20대 청년이 60대 노인처럼 변했다. 불과 며칠만에 노인모습으로 변할 정도로 당시는 등반 환경이 열약했고 처절했다. 현재는 의류, 장비가 발달하니 동상이나 부상이 훨씬 줄었다. 시대에 따라 같은 높이, 같은 공간의 산이지만 장비 및 의류의 발달에 따라 상황의 난이도의 다름을 인정한다. 현재는 옛날에 비해 훨씬 수월하지만 우리 산악인에게는 모험의 공간이 축소된 느낌이 든다.

 

< 철없는 선택 : 직장은 그만두다 >
1993년도에 에베르스트 여성원정대에 대원으로 선발되어 등반에 참가한다. 너무나 가고 싶었다. 철밥통 공무원 신분을 과감히 떨쳐 버렸다. 한마디로 철이 없고, 세상을 모르고 한 일이다. 힘이 들때는 후회도 했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 살다가 또 후회할 날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 세상을 접을 때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8천미터 등반시 7천미터를 넘어가면서 무기력해지고 모든게 귀찮아지며, 신체적 기능이 뚝 떨어지는 현상이 생긴다. 2001년 K2(8,611m) 정상에 오르지는 못하고 마지막 베이스캠프(8,000m)까지 올랐다. 이후 8천미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7대륙 최고봉을 도전 해봐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주도적으로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 멕킨리를 선택하다... >
알래스카산맥의 멕킨리는 북미 최고봉으로 1977년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씨가 추락사한 곳이다. 그래서 단독등반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2003년 마침 덕성여대 등반팀이 멕킨리를 가게되어 서류상으로 한팀으로 허가를 받고 실제는 단독 등반을 하게 되었다. 비용이 넉넉지 않으니 짐도 지고 끌고 가야 하며, 하루 일당이 200불로 가이드도 고용할 형편이 되지 않아 절대로 남의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올라가야만 했다. 이곳은 가이드가 있어도 짐을 들어주지 않고 길 안내만 한다. 맥킨리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은 봉우리다. 1993년도에 에베레스트 7천3백미터 봉우리까지 가서 하룻밤을 자고 왔지만 에베레스트 8,848m는 넘기어려운 경외의 대상이었다. 물론 전세계 산악인이 오른 곳이었으나, 나를 기준으로 볼 때 미지의 세계로 너무나 두려웠다. 맥킨리를 나혼자 극복하면 에베레스트를 갈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거 같았다. 여기서 나를 테스트해 보자하며 갔던 것이다. 성공을 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 안타까운 인연 >
다음해인 2004년도에 에베레스트에 갔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이 적은 금액인 단돈 1800만원으로 계명대 산악부와의 인연으로 가게 된다. 2학번 아래인 같은 30대인 박무택이 찾아와 같이 가자고 했다. 팀의 다른 대원을 떠나기 전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다. 6~7개 정도의 8천미터 고봉을 성공하고 대구에서 제2의 엄홍길이라고 밀어주던 경력과 실력이 있는 박무택이었다. 이 친구들이 처음에는 빨리가는데, 나는 나의 페이스대로 갔다. 내가 친구들과 박무택을 추월해서 캠프에 도착하고 박무택이 1~2시간 차이나게 도착했는데 늦은 이유가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않는 나의 성격 때문에 서먹하게 지냈는데 박무택과 의형제를 맺은 백준호 부대장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1,2,3부로 계획된 각본에 맞춘 촬영 때문에 치질이 있는 박무택은 약을 한국에서 공수 받아 치료를 하면서 등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단지 선배라고 경력과 실력이 월등한 박무택에게 뭐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만 생각하고 견딜만하니까 올라가겠지라는 생각만 했다. 나중에서야 박무택을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가슴아파 했다.

 

< 박무택의 실종.... >
박무택이 정상에 올라가더니 내려오지 않았다. 마지막 캠프에 도착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산소를 공급하는 레귤레이터를 나만 갖고 있었다. 위에서 연락이 와도 레귤레이터가 없으면 올라가지 못한다. 백준호 부대장이 올라가서 박무택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말리지 못했다. 가다가 돌아오겠지 하며 레귤레이터와 체온을 유지할 내 보온병도 주었다. 내가 고용한 셀파 1명과 그 팀의 셀파 1명을 동행시켜 백준호 부대장과 함께 올려보냈다. 2~3시간후 내려오겠지 했는데 셀파만 내려왔다. 셀파는 힘들어서 중간에 내려왔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 산소와 따뜻한 물을 올려달라고 백준호 부대장으로부터 무전이 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오른 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 친구와 무전은 밧데리가 오래가지 못해 이것이 끝이었다. 박무택을 만났다는 소식은 들었다. 박무택과 같이 간 세 사람 중 한 명은 내려왔다. 더 이상 위쪽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구조대가 온다하여 기다리는데 하루를 지나도 올라오지 않고 다른 외국등반팀들만 올라왔다. 8,300미터에서는 숨 쉬는 것만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체력은 계속 고갈되고 있었다.

 

< 정상가는길... 환한 미소의 박무택을 만나다.... >
마지막 캠프에는 텐트에 나와 셀파만이 있었다. 나는 혼자 정상에 오르기로 하고 레귤레이터를 구해보려 이팀 저팀 연락해보았으나 안됐다. 내가 고용한 셀파가 레귤레이터를 구해 들고왔다. 레귤레이터를 받고 올라가려고 산소통 2개를 메고 일어나니 어찔했다. 미끄러져 죽을 것 같아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한통을 내려 놓았다. 가는데 까지만 가보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등반중 움푹 파인 곳에서 엎어져 있는 외국인의 주검을 보았다. 조금 지나 바위위에 비스듬히 로프에 매달려 있는, 벗어놓은 아이젠이 있는 박무택 등반대장 시신을 보았다. 눈물 밖에 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항상 치질로 힘들어서인지 양미간에 내천자를 보였는데 그의 주검은 내천자 주름도 없이 평온한 얼굴표정으로 어린아이가 환하게 웃는듯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다. 어느 누구도 날 보아주지 않는다. 아무도 여기까지 와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난 혼자니까.... 내가 추월했던 사람들이 어느새 나를 추월하고 그냥 자기 길만 가고 있었다. 정신차리고 그들을 따라 산소를 아끼기 위해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하며 열심히 걸었다. 그러고 나니 6천미터 아래에서 등반하는 느낌이었다. 출발한 시간이 밤 12시였는데 가다보니 4~8시간 앞서 갔던 팀을 만났다. 산소게이지를 상황에 따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올라갔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산소가 다 떨어졌다.

 

< 구사일생.... >
산소없이 내려오는데 10분도 안되 손끝이 저려왔다. 동상에 걸릴거 같아 혈액 순환을 위해 손을 털며 기를 쓰고 내려왔다. 위험한 지점의 암벽에 걸쳐진 여러 밧줄이 있는데 언제 설치된 줄인지 모른다. 그래서 줄을 잘못 선택하면 썩은 동아줄이 되는 것이다. 앞서 있는 셀파들의 손짓이 심상치 않아 뒤를 보니 내가 잡은 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아 있었다. 가까스로 다른 줄로 바꿔서 암벽쪽으로 붙여서 무사할 수 있었다. 난 죽을힘을 다해 다해 쫒아가는데 산소를 쓰고있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속도로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신없이 마지막 캠프까지 가야 살 수 있다는 생각하나로 죽을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동양에서 여자 한명이 온 것에 신경쓰였는지 뒤에 올라가는 나를 계속 셀파들이 돌아보며 가고 있었다. 캠프가 눈에 보였다. 그리 멀지않은 거리였다. 마중나올 것이라 생각한 나의 셀파 이름 ‘니마’를 목이 터져라 외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서 있을 힘조차 없어 주저 앉아서 니마를 부르다가 입을 열 힘조차 없어 누워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편하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구름에 떠있는 것 같았다. 천상에 있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박무택도 이런 느낌으로 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밭에 누웠다 정신이 돌아왔다. 나중에 내가 어떨게 정신이 들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누워있는 나의 랜턴불빛은 하늘을 향하고 눈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내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셀파의 랜턴 빛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정신이 들어 일어나 앉은것이다. 셀파에게 나의 랜턴불빛으로 인해 내가 발견된 것이다. 셀파 리마인줄 알았는데 다른팀의 셀파였다. 그 셀파의 보살핌으로 동상도 걸리지 않고 빨리 회복을 했다. 마지막 나의 텐트까지 와서 따듯한 차와 남은 산소를 주며 보살펴 주었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죽음의 문턱까지 넘나들며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을 하니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었다. 더 겸손하고, 더 착하게 살자는 생각과 함께 산에 대한 열정이 더 끓어올랐다. 그해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7대륙 등반에 성공을 한다.

 

< K2(8,611m) 에 도전준비를 하다... >
2005년 2월 1997년 함께한 가셔브롱 등반대원들과 연례행사로 스키를 타러갔다. 체력이 저하되었음을 느껴 초급, 중급에서 안전하게 탔는데 마지막에 리더의 제안으로 맘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고급코스를 타고 내려오다 다리가 꼬여 정강이가 바스러지는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일은 하지 않아야 하는데 몸이 먼저 따라간 것이 화근이었다. 3개월간 깁스를 하고 1년 8개월을 재활하며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과연 8천미터 고봉을 갈 수 있을까? 몸은 회복되었을까? 걱정과 함께 등반을 준비한다. 2005년 7대륙을 성공을 하니 모 기업에서 광고를 찍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2001년도에 K2를 등반했으나 8,000m에서 동료가 추락사해서 실패한 적이 있다. k2는 내가 너무너무 가고 싶었던 봉우리였다. K2 등반 성공을 위해 4단계의 철저한 준비를 한다.

 

2006년 1단계 목표인 시샤팡마(8,027m) 등반 비용을 책임진다고 하여 광고를 찍었다. 호재가 겹쳐 소속사 ‘영원’에서도 등반 비용을 대주겠다는 제안으로 초오유 등반을 연속으로 시도하기로 한다. 동시에 세계 3대 미봉의 하나인 아마다블람 등반으로 2단계를 준비한다. 2단계는 여성으로 구성된 K2등반을 위해 후배 여성산악인을 발굴하는 단계였다. 3단계는 K2등반 전에 고소적응을 위한 목적으로 2006년도 가을에 실패한 초오유 등반으로 정했다. 마지막 단계가 2007년 여름 K2(8,611m) 등반이다. 2006년 시샤팡마를 끝내고 초오유에 가니 아무도 없었다. 셀파 2명을 고용하였는데 1명은 등반을 못해 내려보내고 다른 1명과 함께 올라간다. 정상에서 30여분 거리에 도착했을 때 몸에 이상이 왔다. 다른 곳이 시리면 혈액순환을 시키면서 계속 진행할 수 있는데 머리가 시려워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너무 억울해서 펑펑 울었다. 그 상태로 진행하면 성공은 할 수 있으나 하산후 정상적인 몸의 상태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억상실 증세를 겪을수 있다.

 

1993년도에 에베레스트에 갔을 때 지현옥 대장의 말 ‘우리는 여자다. 손끝하나 다치지 말라. 정상인으로 살 수 있도록 해라. 자기 몸 관리를 잘 해라’라는 말을 언제나 명심하고 있다. 그 다음해인 2007년 초오유를 등정에 성공한다. 선임된 대원과 단 둘이 셀파 고용도 못하고 단돈 1,500만원의 적은 돈으로 진입이 짧은 티벳으로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 K2에 오르다 >
부상 후 내 자신을 극복하면 K2를 갈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어 그 다음 해에 K2를 오른다. 파키스탄은 영어가 능통하지 않으면 고용자들을 통솔하지 못하여 여성 등반가가 견디기 어렵다. 남극에 다녀온 영어 잘하는 친구, 의사, 남성 대원 1명 등 5명을 구성하여 등반을 시작했다. 산소는 K2와 에베레스트만 사용했다. 모든게 순조롭게 진행 되었는데 산소가 문제였다. 산소를 쓰니 머리가 쑤시고 아팠다. 원인은 리필한 산소를 쓴거였는데 리필이 잘못된 것이 이유였다. 해가 뜨고 나니 마스크 벗고 걷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마지막 정상 1-2시간 전까지는 아예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베이스캠프에서 출발 17일만에 정상에 올랐다. 완벽한 날씨덕분에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 마지막 안나프르나에 성공하다.... >
새로운 꿈과 자신이 생겼다. 2010년까지 2년안에 아직 남은 9개봉을 등정해서 14좌를 모두 끝내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그랬더니 방송과 스폰서가 붙었다. 비용걱정 안하고 14좌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14좌 마지막 등반코스가 안나프르나였다. 이때 컨디션이 너무 안좋았다. 안나프르나는 2009년 가을 눈사태 때문에 모든 것이 힙쓸려 내려가 실패한적이 있었다. 2010년 재도전때 공영방송 KBS에서 생중계하기로 했다. 8,000m 등반 경험 방송인들이 모두 뭉쳐 국제적인 생중계팀이 만들어졌다. 한참 생방송중에 ‘더 이상 못가겠어요, 난 여기까지인가봐요’ 라고 포기를 했었다. 모두에게 멘붕이 왔다. 그때 외국등반대 여성의 큰 엉덩이가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빠르지 않는 걸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그녀을 보면 생각했다. 난 항상 ‘발걸음보다 마음이 앞서가면 안된다’ 라고 생각하고 철저히 지켜왔다. 욕심은 필요하지만 과욕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방송이 붙고 스폰이 생기고 대중에게 알려지자 스스로 우쭐거리는 마음이 생겨버렸다. 멋지게 쭉쭉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빨리 지쳐 버린것이다. 그녀는 나보다 1시간 먼저 정상에 선다. 그녀의 엉덩이를 생각하며 ‘내가 너무 급했구나’ 다시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니 걸을 힘이 생겼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성공한 이후의 이야기지만 ‘다 죽어가더니 갑자기 어떻게 힘이 났냐, 쇼한 것 아니냐’ 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렇게 14좌를 모두 마치게 된다. 성공하고 내려오니 내가 가장 존경하는 등반가 ‘라인홀드 메스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역사상 남녀를 통털어 15개월 동안 히말라야 8개 봉우리를 무산소로 오른 사람은 당신이 유일무이 하다. 당신 정말 대단하다’ 라고 찬사를 보내왔다. 끝내고 보니 3년 동안 히말아야 10개봉을 등정하고, 15개월 동안 8개봉을 무산소 등정해 여성최초 14좌를 완등한 것이다.

 

< 마무리말 >
오늘은 성공한 이야기만 했는데 사실 수없이 실패를 했다. 실패를 분석해 보면 왜 실패했는지 성공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힘든 봉우리를 오르고 나면 다시는 산을 안탈거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산이 그립고 다시 가게 된다. 산은 나에게 ‘꿈과 욕심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욕은 부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 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요즘 고려대학 체육학과에서 석사를 어렵게 마치고 박사과정에 있는데 너무 힘들다. 내가 왜 산에 오르는지, 산은 나에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학문에 도전하고 있다. 오늘 강연에 초청해 주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