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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KIST Opinion

한국 과학기술 50년, 불이 꺼지지 않는 과학기술(조선일보 박건형 기자)

한국 과학기술 50년, 불이 꺼지지 않는 과학기술

 

올해는 한국에 과학기술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지 50년을 맞는 해다. 조선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에도 과학은 있었다. 하지만 왜 올해를 50년으로 보는걸까. 이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관련이 있다. 한국 과학기술 연구의 요람(搖籃)이자 산업화의 첨병(尖兵) 역할을 해온 KIST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KIST는 미국의 원조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종합 과학기술 연구소이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65년 우리 정부에 1000만달러를 지원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되지 않을 때였고, 쌀 80㎏ 한 가마에 30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막대한 원조금의 사용처를 두고 빈곤사업, 산업체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이 한국의 미래”라며 원조금에 정부 예산 1000만달러를 더 보태서 과학기술 연구소 건립을 지시했다. 현재 KIST의 대강당 이름이 ‘존슨 강당’인 이유도, KIST 정문에 미국 정부의 후원이 명시된 푯말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KIST는 이후 국산 1호 컴퓨터, 자동차와 반도체 원천기술 등을 개발하며 한국의 산업화와 과학 연구를 선도했다. 포항제철소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전자공업 육성 계획을 세워 반도체와 통신장비 개발의 단초를 마련한 것도 KIST였다.

  KIST가 처음 국민들에게 다가선 것은 1974년 삼성전자가 출시한 컬러TV였다. 당시 KIST 손성재 연구원 주도로 만들어졌다. 1982년 KIST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아라미드 섬유는 강철보다 강도가 5~6배 강하고 무게는 5분의 1에 불과했다. 2년 뒤에는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특허를 받았다.

KIST 설립 초창기는 해외 교포 출신으로 고국에 돌아온 ‘유치(誘致) 과학자’들이 이끌었다. 1966년 연구시설과 인력이 거의 없던 열악한 여건에서 KIST가 탄생하자 미국·유럽 등지에서 18명의 교포 과학자가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힘을 보태겠다”는 일념으로 귀국했다.
  초대 소장을 맡았던 고(故) 최형섭 박사는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만들자”면서 과학자들을 독려했다. 정부도 KIST 과학자들에게 서울대 교수의 3배에 이르는 월급을 주며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병권 KIST 원장은 “선배 과학자들의 헌신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 20개가 넘는 대학·연구소가 KIST에서 탄생해 독립했다. 기술경영경제학회는 KIST가 지난 50년간 일궈낸 사회·경제적 부가가치가 60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1966년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회가 출범한 해이기도 하다. 1971년에는 대덕연구단지가 세워졌고, 198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기초연구가 시작됐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서는 수백년, 일본에 비해서도 100년 이상 뒤쳐졌지만 분명히 이땅에서 ‘과학’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전세계인들은 한국의 놀라운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한국은 전쟁 뒤 폐허가 돼버린 땅에서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글로벌 기업들과 나란히 경쟁하며 어떤 분야에서는 세계 1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에서 출발한 글로벌 기업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기술이 뒷받침된 기술 중심의 기업이라는 것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자동차 모두 최첨단 기술을 받아들이고 이를 상용화하려는 시도가 없으면 도태되는 시장이다. 최근 한국 산업의 미래로 주목받고 있는 제약, 바이오 역시 마찬가지이다. 후발주자인 한국은 정부와 기업, 대학이 한몸으로 움직이는 전략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한국 과학기술은 일종의 정체기를 겪고 있다. 각 기업들이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체적인 연구 역량을 키우면서 응용기술 개발의 주도권은 기업으로 넘어갔다. 한때 국가 성장을 이끌었던 정부 출연연구기관은 ‘돈 먹는 하마’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매년 4조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지만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대학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매년 가을만 되면 왜 한국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냐는 지적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이웃 일본과 비교 대상이 돼야만 한다.

  과학계에서는 50년이라는 시간이 과학에서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한국을 찾았던 영국 왕립학회 벤키 라마크리슈난 회장은 “기초과학의 성과는 최소 40~50년 뒤에야 나타난다”고 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된 20세기 초반에도 미국의 과학은 여전히 유럽에 뒤쳐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미국은 경제 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세계 1등 국가가 됐고, 이 과학의 힘이 다시 미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기초과학에 투자해온 일본 역시 1950년대 이후 본격적인 결과물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아직 한국의 과학은 열매를 따먹을 시기조차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농업은 우리의 먹거리를 해결해주고, 사회과학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미래를 열 수 있는 열쇠는 과학에서 나온다. 한국 과학은 산업화를 일궜고,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이 싹이 자라느냐, 아니면 죽어 버리느냐에 대한 책임은 우리 사회 모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