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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창의포럼]통찰의 힘은 자비심의 꽃(정목스님_문화경영팀 이동주)

묘목 한그루, 해일은 막지 못하지만 무너지는 마음은 붙잡을 수 있다....

 

20174월 창의포럼에서는 1976년에 출가 이후, 오랫동안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며 방송 진행을 통해 우리들에게 마음 공부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치유의 어머니 <정목스님> 초청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정각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고 동국대학교 선학과와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화 상담기관인 '자비의 전화'를 만들었다. 20년 가까이 서울대병원, 동국대병원과 함께 하는 아픈 어린이 돕기 운동 작은사랑을 펼치고 있다 

< 이야기를 시작하며... > 

자그마한 키 ,파르라니 깍은 머리, 단아하게 잘 다려진 승복차림의 정목스님이 무대에 섰다. ‘이렇게 밤낮 없이 우리나라 기초과학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시는 연구원 한 분 한 분 앞에 두 손 합장하는 마음으로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오늘의 제 강의를 시작할까 합니다.’ 라고 하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국민의 세금이 쓰여야 할 곳.... > 

좀 전에 부원장님과 잠시 차담을 나누면서 내가 이런 얘길 드렸다. 국민의 세금이 가장 뜻있게 쓰여야 할 것이 난 과학 분야라고 생각한다. 전국 강연을 다니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관심 가져야 할 분야가 과학 분야이고 지금 이정도로 지원하는 것 가지고는 대한민국 미래를 짊어지고 갈 수는 없다.’ 라고 자주 이야기하고 다닌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서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남의 나라 일이지만 눈을 번쩍 뜨고 보게 된다. 과학과 예술 분야는 국가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라도 물심양면으로 보살피고 후원해야 된다. 실패와 실패를 거듭할 수 있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거듭 실패를 하라고 실패 기금을 주어야 하는 분야가 과학 분야라고 생각한다난 사실 과학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다. 오늘 강연 제목이 통찰의 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통찰이라고 하는 것이 과학도인 여러분들은 이미 가지고 계시는 능력이다. 통찰의 힘을 가지지 않고서는 과학적으로 뭔가를 연구할 수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미세한 바이러스, 미토콘드리아, 박테리아 이런 것 하나를 연구를 한다고 해도 그것과 연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어디로 발전해 가고 있고,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그 유기체적 상관관계를 한눈에 파악하지 않고서는 과학의 연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통찰의 힘인 것이다.

 

< ‘없을 무()’자에 항상 상()’> 

작년부터 과학 분야 공부를 해봐야겠는 생각을 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승가의 불교 공부라는 건 과학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공부하기 어렵다. 불교는 무조건 믿어라 하는 신앙이 전혀 아니다. 불교의 첫 출발은 믿지 마라이거부터 시작한다. ‘부처의 가르침조차도 믿지 마라.’ 신격화 하지 말고 신으로 모시지 마라. 그리고 그것이 실제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 확인이 되지 않으면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리고 어제까지 믿음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 오늘 와서 보니까 아닌 거라면 당장 어제까지 믿었었던 걸 쓰레기통에 다 내다 버려라이렇게 얘기를 한다. 오늘 연구한 것이 어제 한 것보다 훨씬 더 너와 나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고 맞는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한다. 도덕적 신념이나 윤리적 신념이라고 하는 것이 그대로 붙박이처럼 있는 건 없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가졌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것. 진리는 아니지 않는가. 그 시절에는 그것이 어필됐지만 지금 와서는 전혀 씨도 먹히지 않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고 하는 건 계속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고 그것을 불교에서는 무상이라고 한다. ‘없을 무()’자에 항상할 상()’. 항상하지 않은 것이다. 불교에서 오직 변하지 않는 건 하나밖에 없다. 변하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들이 무상하게. 변화해 간다는 사실 하나 만이 유일하게 진리이다.

 

< 반야심경... > 

불교가 과학과 접근하지 않고서는 반야심경 한편도 해석 할 수 없다. 모든 전국 사찰이 새벽에 눈뜨는 새벽 3시부터 하는 예불 중에 꼭 나오는 게 반야심경이다. 이백육십글자로 되어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사천대장경. 그 장대한 경전 속에 반야경에 해당하는 것만 부에 달한다. 통찰을 통해서 꿰뚫어 아는 것을 반야라고 하는데 이는 곧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그 반야심경의 내용을 지금 4차 산업 혁명시대를 모르고는 해석할 수가 없다. 3차원에 앉아서 3차원을 볼 수 없고, 2차원에서 2차원을 볼 수 없듯이 4차원이어야 3차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내용자체가 3차원의 물리적 세계에서 바라볼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불생불멸이라든지 부증불감이라든지 불구부정이라는 경구가 있다. 이것은 욕망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논해봐야 이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인간은 감정이라고 하는 걸 가지고 살아간다. 감정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불안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를 느낀다. 이런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어떻게 불생불멸, 불부부정, 부증불감이 가능하지 않다. 

 

< 4차 산업시대의 화두.... >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와서 인간보다 더 똑똑한 알파고를 만들어낸다고 하니 이제 4차 산업은 정말 인간의 뇌의 감정이라는 걸 떼어 내겠다는 것 아닌가. 뇌 안에서 감정이 사라지면 인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게 하나의 화두이다. 3차 산업까지는 생명에 대한 연구를 했다 한다면 이제 4차 산업은 광물에 대한 연구라고 들었다. 광물과 생물의 공진화를 연구하는 게 4차 산업이라는데 이 세계를 모르고는 불교경전의 한마디도 진도를 못나간다. 쉽게 말하면 우선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세계,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세계,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세계, 그게 욕망의 차원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소리다. 그러니까 소설 쓰는 소리 같고 황당한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과학이 맞물려서 함께 발전해 나가다 보니 지금 불교는 서양에서는 떠오르는 새로운 하나의 이념이 되어 과학도들이 불교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

 

< 화엄.... > 

불교의 화엄경이라고 하는 책이 80권으로 되어있다. 스님들이 마지막 대학과정에서 배우는 과목이다. 그런데 토인비가 영어로 번역된 화엄경의 압축된 내용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다가오는 21세기 시대를 이끌어가게 될 사상이 있다면 불교의 화엄이 될 것이다라며 탄복을 했단다. 그게 무슨 말일까. 불교의 화엄은 딴 말이 아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하고 저것이 소멸함으로 이것이 소멸한다.’ 딱 이 말이다. 그래서 화엄경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연기법이다. 인연이 있어서 연결된다는 거다.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뭐가 아니라 있음으로서 이것이 있게 되는 또 저것이 있음으로서 이것이 있게 되는 이런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유기체적 관계를 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사실 4차 산업혁명은 비유기체적 관계에 대한 것 아닌가. 이제는 그 유기체적 관계의 시대를 끝내고 비유기체적 관계 속에서도 또 다른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게 뭐가 있을까. 뭐 이런 걸 이제 논한다고 알고 있다.

 

< 과학자들의 업적.... > 

불교공부라고 하는 게 과학에 대해서 귀 기울이지 않고, 경청하지 않고는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이 될 것이다. 그러다보니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내가 돈 내고 보는 유일한 잡지가 사이언스지 등의 과학 잡지다. 유명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쫙 나열되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분들의 업적 앞에 경외심이 생기고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고 이거 하나를 연구하기 위해서 전 생애를 바친 그분들의 삶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출가수행자로서 기도하고 수행하고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분들이 얼마나 낮밤 없는 전 생애를 바쳐 열정적으로 연구를 했겠는가. 그 한사람의 연구업적이 세상에 탄생하는 순간 전 인류가 동시에 혜택을 받게 되는데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들고 있는 이 마이크 하나, 내가 서있는 이 공간 하나하나가 과학자들의 업적이 아니고서 우리가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과학도들에게는 더 많은 후원과 지원이 국가 세금이 아깝지 않다 생각하고 지원해야 한다. 

 

<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 > 

내가 쓴 책 중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서 전국 강연을 4년을 불려 다녔다. 4년 동안 일 년 열두 달 365일 중에 거의 360일을 불려 다녔던 것 같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다 보니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직업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나주가 됐건 목포가 됐건 어느 곳이든 시간만 맞으면 웬만하면 다 갔다. 그렇게 많은 곳들을 다니면서 참 많은 걸 배웠다. 특히 장로님들 70명이 모인 자리에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이것은 종교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인데 이게 바로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나라가 망할 나라이겠는가.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이렇게 많은데도 우리는 종교전쟁이 없다. 그저 집안 안에서 찌그렁 찌그렁 싸울 뿐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 절에 다니는 사람. 그것 때문에 총을 쏘아 죽인다던지 이런 일은 거의 드물다. 그러니까 참 대단한 민족이고 우리 정말 별난 DNA를 가진 사람이다. 지금도 시리아 등에서는 폭탄을 터트리고 난리를 치는데 대한민국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 어떤 전쟁보다 가장 무서운 것이 종교이념(전쟁)이다. 아편보다 더 무섭다. 근데 우리나라는 그런 식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기독교건 불교건 함께 잘 가고 있다. 

 

< 달팽이... 그 궁금증을 살피다.... > 

달팽이 책이 나오다 보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강의를 불려 다니며 달팽이라고 하는 녀석에 대해서 연구해보게 되었다. 달팽이라고 하는 그 작은 생명체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을 대신해서 그 조그만 몸뚱이가 우주여행까지 갖다오고 그리고 현기증도 느끼지 않고 쓰러져 죽지도 않고 잘 돌아온 이 작은 생명체를 통해서 오늘 몇 가지 지혜를 배워보고 싶다. 일단 달팽이는 지구에서 가장 느린 생명체에 속한다. 한 시간에 오십 미터를 간다고 한다. 우리가 백 미터 달리기를 910초에 달려가는데 달팽이는 오십 미터를 기어가는데 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인간이 느리다고 표현을 한다. 느리다고 말하는데 달팽이의 우주에서 볼 때는 느리고 빠르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말이다. 달팽이하고 인간이 달리기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과 독수리 또한 달리기를 할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뇌 안의 의식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전 생에 나라를 구하신 분들.... > 

여러분들은 계시는 KIST, 환경이 얼마나 좋은가. 여러분은 정말 아마도 적어도 전생과 그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던 분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공간 못 오신다. 대한민국 땅덩어리 안에 그것도 서울 장안에 여러분은 어쨌건 과학을 연구한다는 이유 하나로 환경이 극락세계인 이곳에서 혜택을 받고 계신다. 그런데 이곳이 극락으로 보이시는지를 여쭙고 싶다. 눈은 뜨고 있는데 그냥 다니시는 건 아닌지 물어보는 거다. 과학 하는 분들에게 통찰의 힘이 자비의 힘으로 꽃피워지려면 시적인 시상이 떠올라야지만이 가능한 것이다. 근데 이 꽃나무를 과학적으로만 해석하면 얼마나 멋없겠는가. 여러분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계시고 이곳을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다른 외부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가 듣기로는 굉장히 만족도가 높은 분들이라고 들었다. 다만 가장 큰 스트레스 중에 하나라면 실적 내놓으라는 것. 업적 내놔라. 세금 받아먹은 것만큼 결과 내놔라. 근데 그걸 빨리 내놔라. 이게 가장 죽겠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거는 백년을 투자해서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것을 기다려야 되는 거다. 그게 정말 과학적으로 우리가 후원하는 것이 실패를 거듭할 수 있도록 연구실의 환경을 더욱더 좋게 지원해야 한다. 대통령 후보로 나오시는 분들 중에 과학발전에 힘쓰겠다는 말을 하는가 안하는가를 제일 먼저 본다. 그것은 차세대의 우리 후세 사람들이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해주는 운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근데 별로 과학에 대해서 말하는 분이 없다. 

 

< 달팽이 느림의 교훈.... > 

달팽이라고 하는 이 작은 생명체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기어 다니는 생명체 하나하나가 이 아침에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성자들만의 가르침. 훌륭한 사람들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 생명체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를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달팽이를 그렇게 느리다고 하는데 달팽이의 우주에서 볼 적에는 느려요. 빨라요 라고 하는 말이 의미 없다는 말씀을 드렸다. 여러분들이 과학의 업적을 내야하고 실적을 내야하는 자리에 있으시지만 여기 계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모두 유능한 과학도일 수는 없다. 출중하고 뛰어난 브레인을 가진 분도 있겠지만 같은 과학도인데도 아직 중간 혹은 밑에나 계시거나 의식 차원이 다른 분들이 뒤섞여있을 거다. 이게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가. ‘유능하고 능력 있는 사람만 세상 살아가라 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 바로 달팽이가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한 시간 동안 50m를 기어가지만 달팽이의 우주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자기의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늦다 빠르다는 아무 필요가 없다. 

 

< 놀고먹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 

죽음은 지금까지 종교도의 문제였고 철학의 문제였지만 이제는 공학도에게 넘겨야 된다고 본다. ‘죽음을 공학도가 해결하겠다. 이것은 기술적인 문제다.’ 이 말이 가장 충격적 이었다. 지금까지 죽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저편 너머의 세계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영생의 길로 가는 길을 열겠다는 거 아닌가. 정말 눈 크게 뜨고 공부 안할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 와있다. 원장님이나 부원장님 입장에서 볼 때는 연구업적을 내지 못하는 연구원이 있을 때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주는데 그렇게 업적을 못 내가 지고 너 어떻게 할래.’ 라고 하는 마음이 당연히 들것이다. 그러나 더러는 이렇다. 놀고먹는 사람이 있어야 또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도 있는 거다. 그러다보면 이 중에 한 두 사람이 엄청난 연구를 한다. 근데 중요한 사실은 그 한 두 사람은 이 놀고먹는 사람 때문에 연구를 하는 거라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을 위해서 이 공간을 허락하진 않는다. 여러분 그렇지 않은가? 너무 말도 안되는 웃기는 얘기로만 들리는가. 아무튼 느린 걸음으로 간다. 빠른 걸음으로 간다.’ 가 아니라 각자의 인생의 속도를 허락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달팽이를 통해 배워야 한다. 이 말은 여러분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업적도 내지 말고 들입다 놀아라. 라는 말은 아니다. 연구를 하는데 안되는 게 있다. 그럴 때 실망하시지 말라는 거다. 스스로의 느린 걸음에 대해서 낙담하거나 좌절하는 것은 과학도에게는 금물이다. 과학자는 열정이 식으면 안 된다. 종교인과 과학자가 가야할 길 열정 식으면 이거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실패한 것 앞에서 또다시 열정을 불태울 수 없다. 그런다면 그때는 정말 과학도의 명함 내놓아야한다. 그런 사람에게 국가가 녹을 줄 수는 없다. 

 

< 저항하지 않는다.... > 

두 번째는 달팽이는 저항하지 않는 생명체라는 걸 우리는 꼭 기억해야한다. 여러분 혹시 실험을 해보셨는지 모르는데 칼날이 번뜩번뜩하는 것 위에 달팽이를 올려놓으면 그 칼날을 미끄러져 기어가는 달팽이는 절대 몸이 베이지도 피도 나지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점액질이 나오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점액질만 가지고는 몸이 안 베일 재간이 없다. 칼날의 번뜩거림보다 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못 베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신기한 생명이다. 저항하지 않는 생명이라고 하는 건 나와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할 메시지 중에 하나다.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밤에 잠들 때 까지 저항하면서 살고 있다. 좋다 싫다, 나쁘다 예쁘다, 이렇다 저렇다, 기분 좋아, 기분 나빠, 그리고 사람을 평가하느라고 온종일 저항한다인생을 살다보면 자기에게 닥쳐오는 걸 만나야 할 때가 있다. 만났을 적에 피해서 돌아가려고 하지마라. 지금 이 순간 그걸 피해서 돌아가면 저 골목에서 그것이 기다리고 있다가 골목에 숨어 있다가 나와서 또 만나게 된다. 언제 만나도 만나져야 하는 것 일 때는 반드시 그게 내게 돌아오지. 피해서 도망갈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 말은 홍수가 나서 떠내려 오면 자기가 헤엄을 좀 칠 줄 안다고 물살을 헤치고 이리 비틀어보고 저리 비틀어보다 힘이 쫙 빠져서 죽는다. 근데 소는 이러나저러나 헤엄을 못하니 그냥 어화둥둥 떠내려가는 거다. 그러다보면 하류에 가서 빠져나올 수가 있다. 닥쳐온 상황에 대해서 그것을 저항하는 마음으로 다가간다고 그래서 거기서 지혜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삶은 더 나은 발전의 도약을 만들어준다. 

 

< 멈추지 않는다.... > 

세 번째가 달팽이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생명체라는 것 또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달팽이는 눈이 없고 더듬이로 간다. 더듬이로 어디에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딱딱 짚으면서 가는데 앞에서 위험 물질이 나타나면 그냥 몸뚱이를 싹 말아가지고 자기한테 딱 맞는 껍질 속으로 쏙 들어간다. 호랑이나 사자는 먹이를 물어뜯는 이빨을 가지고 있다. 강인한 이빨. 고슴도치는 가시를 가지고 있고 뱀은 독을 가지고 있고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뭐 한 가지의 방어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달팽이는 아무 무기가 없다. 스스로를 보살필 무기라는 것 자체가 없고 위험이 오면 그냥 자기 집 속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잠시 피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 다음에 달팽이가 앞으로 전진은 되는데 후진은 안 되는 건 아시는가. 위험이 있나 없나 확인 후 또 앞으로 전진 한다. 계속 자기가가 가야할 길 만을 향해서 정말 뚜벅뚜벅 나아간다. 근데 우리는 조금만 힘들면 그만 손을 놓아버리고 싶어지고 그냥 모든 걸 때려치울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니체가 ‘20세기 30세기를 살아보고 고통스럽다고 명함 내밀지 마라. 적어도 일만 년에서 이만 년을 죽었다 태어났다 죽었다 태어났다를 해보니 이거 진짜 힘드네.’ 하고 그때 가서 명함 내밀어도 늦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업적, 실적 내놓을게 없으면 아, 어떡하면 좋지. 고민을 하는 것은 좋으나 낙담과 절망을 통해서 스스로가 더 이상은 일어나지 못하겠네. 하는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지금 니체가 하고 것이다. 

 

< 쓰나미... 한그루 묘목.... > 

인도네시아에 2003년 쓰나미가 왔다. 전 세계 각국에서 봉사대가 가고, 의료진이 뜨고 도움을 주러 갔다. 그 마을 전체가 바닷물이 들어와 헤일에 휩싸여 그 마을 전체가 통째로 날아갔다. 사진전을 갔다가 굉장히 감동 있는 사진 한 점을 봤다. 사진 속에 네 살에서 여덟 살까지 먹은 꼬마들이 오물오물 모여가지고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황폐한 마을에 들어가서 나무묘목을 심는다. 그 광경을 본 외국인들이 아이들에게 얘들아. 거기에 그 나무를 심는다고 이게 뭐 너희들에게 힘이 되겠니?’ 라고 묻는다. 그랬더니 그 중에 일곱 살 먹은 꼬마가 이렇게 대답하는 내용을 그 사진에 밑에다가 붙여놨더라. ‘맞아요. 이 묘목이 거대하게 밀려오는 해일을 막지는 못할 거예요. 하지만 자꾸 절망하려는 내 마음을 붙들어 줄 수는 있지 않겠어요? 난 이런 것이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먹는 게 어른이 아니더라. 정말 자기가 위기 앞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가 진짜 어른을 판별하게 한다. 

 

< 통찰의 힘... > 

어느 관점에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 통찰의 힘이 다르다. 내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불평, 불만 밖에 없다. 나를 통해서만이 우주가 펼쳐지는 건 아니지 않는가. 내 위치에서만 세상이 돌아가주라는 법은 없다. 나의 우주와 그대의 우주. 나와 그대를 제외한 나머지 우주는 전부 물질 우주다. 나와 그대와 물질우주의 세계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되는 세상 속에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내 우주 밖에 없다. 내 시각을 빼서 저 대상 사물이 나를 보고 있는 걸로 보게 될 때 정말 세상은 달라진다. 세상 사물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를 볼 수 있도록 또 하나의 눈을 뜰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 역할을 바로 과학도인 여러분이 해주셔야 한다. 우리가 이런 걸 깨달을 수 있도록... 과학자들의 눈은 바로 그런 거 아닌가. 정말 인생에서 우리는 멈추고 싶을 때 있고 주저앉고 싶을 때 있고 그만 살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에겐 그런 경우가 거의 없을 지도 모르겠는데 이 세상 바깥. 바로 이 키스트 바깥만 나가면 그만 살고 싶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그게 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봐서는 세상은 전혀 통합적으로 보아지지 않는다. 이제는 지식이 경쟁력이 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냥 밥하는 아줌마, 시골에 있는 할머니도 인터넷 뒤지면 모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지식이 무슨 경쟁이 되겠는가. 오직 통찰의 힘이 앞으로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경쟁력인데 과학도인 여러분이 해주셔야 되는 역할인 것이다. 

 

< 인생의 목표... > 

정말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어른다운 것일까. 누구는 판사, 검사. 누구는 과학자. 누구는 의사. 뭐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이 직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은 아닌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몸 받아 올 때 과학자가 되려고 이 세상에 온 거 아니고 의사 되려고 대통령 이런 직함 가지려고 세상에 오지 않았다. 이건 수단이다. 이 세상에 와서 살다보니 우리에게 그 역할이 주어졌고 거기에 우리가 기여해야 되는 바가 있다 보니 저는 종교인이라는 걸 선택했고 여러분은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인생의 목표는 뭘까. 정말 있다면 한가지다. 나 자신의 성장과 타인의 성장을 돕기 위해서 온 것 밖에 없다는 거다. 그게 인생의 목표이다. 내가 고통 받고 싶지 않듯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주지 않을 수 있는 것. 내가 행복 하고 싶듯이 다른 사람이 행복을 완성할 수 있도록 협조할 수 있는 것 바로 그거다. 지금 이 시대는 패밀리의 개념을 다르게 가지기를 바라고 있는 시대다. 내 아들 딸. 내 자식, 김씨, 박씨 그 다음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이렇게 영역을 정하고 어느 대학 출신이냐 이렇게 라인을 정하는 사람살이가 아니라 이 모든 경계를 다 넘어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내 부모 형제 아니었던 자가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마음.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된 사실이다. 이런 생각과 마음을 가질 때 어떻게 그가 고통 받는 걸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으며 그가 행복한 것을 보는 순간 어떻게 시기심과 질투심에 내 눈이 멀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마음을 가져주는 자비심이 없이는 그게 종교가 됐건 판사, 검사, 의사가 되었건 과학자가 되었건 그것은 반쪽짜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 마무리말... >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간다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지혜를 풀어 놓을 수 있고 또 내가 남을 도울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협조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60년에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노인국가 1위가 된다고 한다. 과학의 발달로 우리의 수명은 늘어났다. 연장되고 늘어난 이 수명을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와 있고 그것은 과학도인 여러분들의 몫이기도 하다. 부디 고통 받으며 무지몽매하게 어리석게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 여러분의 과학적 업적과 연구가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되고 그들의 행복의 길에 비단길을 놓아줄 수 있는 길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곧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내가 있는 사찰에 아름다운 등불을 켜고 KIST에서 이렇게 과학을 연구하고 계시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부디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행복하시기를 기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