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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STORY/KIST 소식(행사·연구성과)

[창의포럼] 춤춰라, 희망이 온다(팝핀현준)

압구정동에 웬... 배고픈... 거지가 나타나다...

(3월 창의포럼 후기)

  

  

2018년 3월 창의포럼에서는 대한민국 춤통령이라 칭할수 있는 공연예술가 팝핀현준을 초청했다. 그는 1979년 서울에서 출생하셨으며 12살때 팝핀댄스에 빠져 30년 가까이를 이 춤에만 매달려 살았다고 한다. 어린나이에 가난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세상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춤에 매진하여 오늘날 공연계술계 최고의 춤꾼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룹 ‘영턱스클럽’ 객원멤버, 댄스팀 ‘바이닉 주노’ 멤버로 활동했다. 그리고 6집의 음반을 발표 했으며 팝핀현준아트컴퍼니 대표를 역임했다. 2007년에는 'One &Only' 저서를 출간했고, 2012년 평창동계 스페셜 홍보대사, 2013년 제 12회 국제 음악극 축제 홍보대사, 2017년 아테네 성화봉송 평창조직위원회 축제공연, 2018년 평창올림픽 성화봉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중에 있다. 현재 서울호서예술전문학교 실용무용예술학부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방송활동도 많이 하고 있는데 KBS 2TV '불후의 명곡'에 국립창극단 출신인 부인 박애리와 함께 수회 출연하여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이외에도 네이버 TV 세바시, KBS1 TV 명견만리, 기타 다양한 예능프로그램 등에 출연하고 있다.

  

< 이야기를 시작하며... >

170센치도 안되어 보이는 다소 왜소한 체격...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이마에서 부터 여러갈래로 땋아 단정하게 정리하고, 작은무늬가 들어있는 하늘색 계열의 평범한 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다소 커보이는 흰운동화를 신고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걸이로 우리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팝핀현준입니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처음으로 강연을 하는것 같아 너무 설레고 지금 긴장도 많이 된다’ 라고 말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엄마한테 내가 오늘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가서 강의를 한다고 했더니 “네가?”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야, 우리 막내아들이 학교도 보내기 힘들었는데 ‘너 오늘 가서 잘해라... 이상한 말해서 무식한 거 티내지 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지금 너무 떨린다.

  

일단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거와 같이 팝핀현준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팝핀이라는 것을 다 아실 거다. 혹시 춤을 좀 좋아하시면 예전에 각기춤, 꺽기춤, 털기춤 이런 말씀을 들어봤을거 같다. 꺾어서 추는 이런 춤을 예전에는 각기춤이라고 했었는데 이런 춤을 바로 팝핀이라고 한다. 힙합이 미국문화이기 때문에 모든 용어가 다 영어다. 이름도 우리가 알고있는 뒤로가기 댄스... 이런 동작이 ‘문워크’라는 동작인데 이것도 영어로 돼있다. 내가 추고 있는 춤을 각기춤이라고 이야기하면 외국에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한국 사람들만 알아듣는다. 대한민국이 전세계 이 스트릿댄스라고 하는 힙합댄스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 있다. 내가 어렸을때 세계대회에 참가자로 활동을 많이 했었다. 지금은 여러나라에 심사위원으로 나가는데 외국 친구들이 나한테 늘 얘기한다. ‘세상에서 제일 춤을 잘 추는 애들 10명 중에 8명이 너희 나라 출신 즉, 대한민국 비보이인데 어떻게 용어정리가 그렇게 안되어 있냐’ 며 이야기 한다. 그래서 내가 방송에 나갈 때마다 ‘제가 추는 이춤이 팝핀춤입니다’ 이렇게 늘 말씀 드린다. 그랬더니 팝핀현준만 유명해졌다. 여전히 방송국에서는 각기춤이라고 이야기한다. 내일 모레 ‘불후의 명곡’ 녹화가 또 있는데 거기에서도 다시 한번 ‘팝핀춤을 추고 있는 현준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려 한다. 여러분들께서도 이제부터는 각기춤, 꺾기춤이 아니라 팝핀춤으로 불러주시길 바란다. 결혼을 위해 장인어른을 찾아뵈었는데 ‘그러면 자네. 어디 팝씨인가’ 하고 물으셨던 적이 있는데 본명은 남씨... 남현준이고... 팝핀을 추는 현준이...해서 팝핀현준이 됐다.

  

< 영턱스클럽... 그 영광과 몰락... >

내가 활동했었던 모습들을 조금씩 여러분들한테 소개시켜드리려 한다. 1998년도에 영턱스클럽으로 데뷔를 했다. 영턱스클럽은 여기계신분 모두 잘 아실 거다. ’한번만 안아주세요~~‘ 이게 2집이었고, ’다른 여자 생긴거라면~~‘ 그게 ’정‘ 이었다. 그리고 3집 혹시 아시는가? ’흰 눈이 내려와~~‘ 모르실거다. 내가 참여한게 4집인데 정말 모르실거다. 영턱스클럽이 1집, 2집 때 완전히 최고로 갔다가 3집 때부터 약간 시들면서 4집때 망가졌는데 망가지면서 내가 멤버로 들어간거다. 참 이게 슬픈 일이기도 하고 내가 더 이를 악물고 춤을 추게 했었던 이유가 됐던 앨범이기도 하다. 1집, 2집, 3집을 하셨던 영턱스클럽에 두 명의 남자 댄서가 있었다. 물론 그때는 춤을 추시다가 가수로 데뷔하신 분이니까 그 이후부터 가수다. 1, 2, 3집에 참여했던 그 남자 멤버분들이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춤을 제일 잘 췄던 사람들이다. 정말로 너무나 멋있게 춤을 잘 추는 형들이었기 때문에 영턱스클럽 1집, 2집, 3집은 별도의 댄서가 없다. 뒤에서 같이 춤을 춰주는 백업댄서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5명이 다 춤을 잘 추니까 굳이 백업댄서를 쓸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런 영턱스클럽의 4집 멤버로 내가 들어가면서 그 분들이 나갔다. 이제 내가 그자리를 다 메꿔야 했다. 진짜 어깨가 너무 무겁고 신인 멤버로 들어왔기 때문에 기존에 있었던 멤버들의 텃세도 있었다. 나이도 제일 어리고 하니까 막내, 막내, 하면서 ’야 그런 식으로 춤추면 안돼. 우리 팀이 얼마나 춤을 잘 추는 팀인데 이따위 밖에 못해? 이런 식으로 혼냈다. 그래서 정말 밤새도록 연습을 하느라고 타이틀곡 랩 녹음을 외우지 못했다. 다음날 연습실에서 매니저가 ‘곡 다 외웠지’ 하며 오늘 녹음하는 날이라고 날 처음으로 녹음실로 데려갔다. 노래방 같은 크지않은 상자안에 들어가서 노래를 하는건데... 내가 25년 가까이 춤을 추는데도 이렇게 무대가 떨리는데 그 어린 나이에 녹음실에 들어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려니 얼마나 떨렸겠는가. 그것도 처음 보는 곡인데... 그 당시에 최고의 작곡가 선생님... 바로 윤일상 선생님이 우리 타이틀곡을 만들어 주셨다. 작곡가 선생님이 ‘노래 해봐’ 해서 노래 못외웠다고 하니까 10분의 시간을 주고 외우라고 했다. 10분 동안 어떻게 외우는가. 못 외웠다. 결국은 나를 빼고 녹음을 해서 타이틀곡에 내 목소리가 없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왕 이렇게 된거 춤으로 승부를 봐야겠다하고 마음먹었다. 나를 더 열심히 춤을 추게 했고 어떻게 보면 영턱스클럽이 나에게는 좋은 작용을 했다고 본다.

  

< 또다시 폭 망함.... >

이후 2005년도에 ‘사자후’라는 싱글앨범을 냈다. 2007년도에는 돈스탑, 2009년도에는 에이포스, 그리고 2015년도에는 나는 현준입니다. 라는 앨범을 또 냈다. 이렇게 앨범을 굉장히 많이 냈는데 사람들은 날 댄서로만 기억한다. 그래서 내가 가수로는 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2007년도에 돈스탑이라는 앨범을 냈을때 타이틀곡 내용이 포기하지 않고 춤으로 갈 수 있는곳 그 끝까지 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그 말처럼 앞으로 더 열심히 앨범을 낼 계획을 갖고 있다. 아무래도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려면 호흡이라든가 이런게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잘 부르는거 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댄스가수들은 여러 작업을 많이 한다. 예를 들면 아주 쉽게 노래할 수 있게끔 밑 즉 MR을 좀 깔아놓는다. 이것을 더블링을 친다고 얘기를 하는데 높은 음을 몇 개를 잡아 이미 녹음을 해놓고 그 파트가 지나면 ‘이야! 어!’ 하고 쉬운 부분만 노래하고 다시 춤을 출수 있게끔 한다는 말이다. 특히 솔로인 경우에는 더 그게 많아지는데 난 솔로로 이런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해야 했다. 팝핀이라는 춤이 근육에다가 힘을 주는 거기 때문에 힘을 줄때마다 으,으,으,으... 이렇게 힘이 들어간다. 심지어 바이브레이션이라고 몸을 떠는 춤, 그거는 으으으으으! 이런 식으로 목소리가 흔들린다. 노래를 하는데 이게 저 친구가 어떻게 가수가 됐지. 싶을 정도로 음이 떨린다. 기획사에서 나한테 ‘야 아래 다 깔고 가자. 그냥 쉬운 것만 부르고 높은 건 다 깔고 가자’ 라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그랬다. 이렇게 부르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이게 진짜니까... 여러분들도 나처럼 춤추며 노래방 가서 노래 해봐라. 이렇게 되나 안 되나. 내 춤추면서 M.O.V.E 팝핀현준 ~~ 이렇게 이런 식으로 하면 반드시 떨릴 거다. 난 대중에게 솔직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득부득 밀고 나갔다가 결국 망했다.

  

< 바퀴발레가 날 울리다.... >

2009년도에 ‘에이포스’를 만들었다. 팝핀현준이 퍼포먼스(댄스)가 좋으니까 노래를 잘할 수 있는 여자 멤버 4명을 붙였다. Boney M이라는 외국가수가 있잖은가. 우리 Boney M을 벤치마킹해서 만들자. 라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했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용감한 형제’에게 곡을 받고 팝핀현준이 안무를 짜고 여자애들이 노래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용감한형제가 ‘형! 내가 진짜 기가 막힌 비트 만들어 줄 테니까 형은 거기에 멋있게 춤만 딱 추면 된다... 라고 해서 진짜 멋있게 춤을 만들었다. 막 날라다니고 몸을 3단으로 4단으로 꺽고... 근데 소속사 사장님이 그걸 딱 보시더니 ’우리 1집 했을 때 네 춤이 멋있긴 한데 너무 어려워서 대중들이 못 따라 했잖냐. 그러니까 이제는 대중이 좀 따라할 수 있는 쉬운거 하나 만들어 봐‘ 해서 고민을 했다. 어느날 연습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바퀴벌레 한 마리가 지나가는 거다. 그래서 그 바퀴벌레를 보면서 저거다.. 하고 바퀴벌레 춤을 만들었다. 바퀴벌레가 이렇게 기어가듯이... 그런 다음에 사람이 딱 치면 죽는데 꼭 뒤집어서 죽는다. 그래서 노래하는 여자멤버들이 날 딱 치면 내가 몸을 뒤집어져 바퀴벌레가 죽는 모습을 춤으로 보여드렸더니 사장님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다. ’이거야. 내가 말한게 이거였어. 야~ 가즈아‘ 해서 그걸로 앨범을 만들어 발표했다. 뮤직뱅크에 갔다. 뮤직뱅크가 전문음악방송인데 ’팝핀현준팀 나오세요. 이제 리허설 갑니다‘ 해서 보여드렸더니 갑자기 뮤직뱅크가 개그콘서트로 바껴버렸다. 사람들이 다 빵 터지고 막 웃었다. ’아, 드디어 터졌구나. 잘 됐구나... 하고 생방송에도 나갔다. 그리고 나서 인터넷 연관검색어에 ‘팝핀현준 세스코’ 이게 떴다. 세스코. 바퀴벌레 퇴치업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춤을 추는데 에프킬라가 가지고 나에게 막 뿌리는 그런 짤방(움짤)이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조금 더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몇번 더 방송에 나갔다. 인기가요도 가고, 음악캠프도 가고, 공중파를 몇 개를 딱 도니까 전화들이 오더라. 그때 내가 영화배우 이준기의 춤 선생으로도 유명했었고, 또 가수 조관우의 콘서트 안무 감독을 맡아 연말콘서트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 두분이 바퀴발레 춤을 추지말라고 했다. 뭐가 잘못 됐다고 생각해서 사장님한테 말씀드렸다. ‘사장님, 이건 아닌 것 같다. 뭔가 잘못된거 같다. 옛날같이 멋있게 춤추는게 나을거 같다고’ 라고 했더니 ‘아니야 인마, 이건 실패가 아니야. 그리고 그런 댓글 보지 말라고.... 이런 반응이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잖냐. 이건 되는 거라고’ 해서 댄서들 10명을 데리고 바퀴벌레 춤을 같이 추었다. 바퀴벌레가 알을 깐거 같이 말이다. 그래더니 방송국에서 ‘다음주는 안 나오셔도 된다’ 고 연락이 왔다. 결국 망했다. 어쨌든 바퀴벌레 춤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내춤을 만들어 내긴했다. 지금도 가끔 그춤을 어떤데서 추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곤 한다. 그 당시에도 창피하다고 생각 안했다. 왜냐면 내가 만든 창작춤이고, 작품이고 또 내가 원해서 했던 일이기 때문에 그냥 즐거웠던 추억으로 생각하지만 씁쓸한 기억이다.

  

< 영화배우 팝핀현준... >

영화도 찍었다. MBC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 에 출연했고 영화 ‘플라이 대디’ 는 이준기씨랑 같이 작업한 거다. 그리고 ‘쿵후힙팝’은 중국에 김태희라 불리는 판빙빙과 내가 주인공으로 찍은 영화다. 소속사 사장님이 한국에서 앨범을 그렇게 말아먹고 이놈을 어떻게 하지. 아직 계약기간이 남았는데. 한국에서 더 해보자니 흔히 하는 말로 망가졌고 한국에선 한번 쉬었다가 가야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중국으로 가라라고 한거다. 그때는 진짜 중국에 신호등도 없을 때다. 중국에 가면 딴 나라구나. 진짜 확 느껴지던 때였다. 그때 ‘쿵후힙합’이라는 영화 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조금 보류해보자고 했다. 왜냐면 다들 헐리웃 가고 미국으로 진출하고 그리고 유럽으로 진출하는데 나만 중국에 왔지 않냐.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했다. 마침 그런 찰나에 영화 ‘스텝업’이라는 헐리웃에서 만든 댄스영화가 있다. 그게 진짜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했었다. 1편이 히트하고 2편 히트하고 아마 3편 때일 거다. 3편 때 아시아에서 넘어온 춤왕의 캐릭터를 구상하고 감독이 나한테 연락을 해와서 LA에 갔다. 감독이 날보고 너무 반가워했다. ‘유튜브에서 늘 보고 있다. 왜 한국에서 있냐. 여기 미국에서 살지’ 라고 했다. 너같은 캐릭터가 필요하니 같이 영화를 해볼 생각이 없냐 라고 물었다. 난 너무 해보고 싶은데 소속사와 계약이 돼 있어서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매니저랑 얘기를 하라고 했다. 매니저는 무조건 첫번째가 돈이 우선이다. 여기 내 매니저가 와 있는데 이 친구는 아니다. 이 친구는 인간적이고 착한 사람이다. 매니저는 개런티로 5만불을 주고 초호화 대접을 해달라고 했다. 물론 5만불이 크면 클수도 있고 또 연예인들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개런티로 봤을 때는 안클 수도 있지만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에서는 엄청나게 큰돈이다. 그 감독이 뭐랬냐면 ‘여기 나오는 어떠한 배우도 5만불의 개런티를 받지 않는다고. 그리고 너를 정말 아티스트로서 존경하는 마음에 친구로서 같이하자고 한거지 지금 우리가 돈 얘기를 하려고 부른게 아닌데, 너무 안타깝다. 다음 기회로 미루자’ 라고 해서 난 정말로 아깝지만 마음을 접었다.

  

< 그놈의 지진이 발목을 잡다.... >

그런데 중국에서 내가 이 영화를 찍으면 그 돈을 주겠다는 자가 나타났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입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중국 가서 궁후힙합 영화를 찍었다. 헐리웃에서 ‘스텝업’ 에 나올 뻔 했었지만 못나오고 ㅠㅠ... 근데 이 영화를 찍으면서 이런 일이 있었다. 영화 스폰서가 펩시콜라였다. 그런데 펩시콜라의 본사에 있는 분이 오신 거다. 그분이 2008년도면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중국 시장이 굉장히 커지니까 펩시콜라 CF 모델을 아시아인으로 뽑고 싶어해서 나에게 요청이 왔다. 펩시콜라 중국 전 대륙에 나오는 CF모델이었다. 두명의 CF 모델중 한명이 나이고 또 한명은 판빙빙이었다. 나는 솔직히 판빙빙보다 잘할 수 있는게 더 많다고 하니 보여달라고 했다.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펩시콜라 캔을 들고 한 30분을 춤을 췄다. 진짜 먹는 춤, 머리에 올려놓고 움직이고 별 춤을 다 췄다. 춤도 좋고 마인드도 좋다고 하면서 오늘 네가 영화 찍는 씬을 모니터를 하다가 너한테 손가락을 이렇게 치켜세우면 네가 CF 모델이 된 거라고 했다. 어디서 보고 있는지 넌 모를 테지만 끝까지 열심히 영화를 찍으라고 하면서 자리를 떳다. 난 속으로 나한테 구라쳤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엄지를 치켜 드는것도 볼 수도 없고, 어딨는지 알 수도 없는데 진짜 영화 찍는 내내 그 사람을 찾았다. 그러다 구석에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 사람만 보고 계속 춤을 췄는데 진짜로 나갈때 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나간 거다. 난 그냥 반신반의로 되면 되고 아니면 말자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정말 열심히 한 덕분에 기가 막히게 나왔다. 진짜 딱 한달 뒤에 연락이 왔다. 펩시콜라 모델로 발탁이 됐으니까 홍콩으로 넘어오라고... 그래서 홍콩에 가서 펩시콜라 중국 전 대륙 모델을 했었다. 춤으로 펩시콜라 광고를 찍은건 내가 최초였다. 이 영화는 나한테 그런 행운을 가져다 줬다.

  

이후 펩시콜라에서 나한테 ‘당신은 에너지가 좋으니까 이 영화 홍보하러 중국에 다니면서 100군데에 중국 행사를 계약을 하자’ 고 제안을 해왔다. 100군데면 우리나라 돈으로 어마어마한 돈이다. 소속사 사장님이 날 지그시 안아주시면서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옛날부터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팝핀! 잘했어. 뭐 갖고 싶냐’ 고 물어서 철이 없을 때라 난 람보르기니가 갖고 싶다고 했더니 선뜻 승락을 하셨다. 람보르기니 서울 사무소에 가서 노란색으로 계약을 먼저 했다. 나중에 돈은 완불하면 되니까... 그런데 사천 지진이 났다. 그래도 우린 이미 계약서에 사인했으니까 그들이 약속했던게 엄청나게 큰돈이니까 그 몇 십억중 반이라도 좀 받아야 되겠다...고 해서 꼼꼼히 알아봤더니 계약서 맨 마지막에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일은 아무도 변상해주지 않는다’ 라고 되어 있었다. 진짜 너무나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근데 천만다행이 뭐냐면 사천지진이 나는 바람에 중국 정부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문화를 다 막았다. 일체 공연예술도 허가하지 않고 한 3개월, 4개월을 그렇게 꽉 막아놨었는데 그동안 중국 사람들이 볼 영화가 쿵후힙합 밖에 없는 거다. 중국에서 박스오피스 1등을 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다 나를 알아보고 사인을 해달라는 통에 공항을 다닐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난 중국에서 인지도를 좀 많이 쌓았던 영화여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 CF 광고모델 기피 1순위가 되다... >

이제 CF이야기를 해보자. 2004년에 조PD의 ‘친구여’라는 노래 혹시 아시는가? 인순이 누나랑 같이 불렀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가 굉장히 큰 히트를 하게 됐는데 CF가 한몫을 했다. CF를 보면 어린애도 나와서 팝핀춤을 추고, 아빠도 나와서 팝핀춤을 추고, 할머니도 팝핀춤을 추고 이렇게 온가족이 팝핀춤을 추는 CF로 세간에 이슈가 됐었던 작품이다. 그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삼성 YEEP, LG 캔유, 하이트 맥주, SK 엔크린, 펩시콜라 그리고 베이직하우스 등등의 2007년도부터 2008년도까지 1년 동안 10개의 CF를 단독모델로 찍게 되었다. 근데 내가 광고주가 제일 싫어하는 모델로 뽑혔다. 왜냐 했더니 사람들이 춤만 기억을 한단다. 내가 핸드폰을 들고 춤을 췄는데 핸드폰 광고로 안 보이고 저 친구 춤진짜 잘 춘다. 라고 누군지 한번 검색해 보라고 하고... 엔크린 CF는 주유소에서 춤을 추는 거였다. 차를 타고 가다가 기름 넣으면서 춤을 막 추는데 ‘와 주유소에서 저런 춤이 되나? 나도 해볼까’ 라든가... 맥주 마시면서 춤을 췄는데 맥주는 안 보이고 대중들은 춤만 기억했다. 김연아 선수는 30개가 넘는 CF를 찍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건 딱 하나 있다. 씽씽씽씽~~~ 그렇게 너무나 인물이 강하면 제품이 가려져서 그런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난 지금도 CF가 안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공연으로서는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는 들어보았는가? 그리고 이주노씨의 ‘빨간구두’ ‘비보이코리아’ 뭐 이러이러한 공연들을 많이 했었다. 지금도 하고 있고 불후의 명곡 이런 르로글 통해 안무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 갑자기 집이 망해 버렸다.... >

이제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건 이제껏 살면서 겪어왔었던 인생의 한 부분이다. 1995년도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가수가 <서태지와 아이들> 이었는데 ‘컴백홈’이라는 4집 앨범을 부를때였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청소년의 우상 문화대통령이었으니까 ‘컴백홈’이라는 노래로 집 나갔던 많은 가출 청소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이슈도 많이 되고 대통령한테 문화대통령 상도 받았다. 난 고등학교 1학년때 컴백홈 노래를 듣고 가출을 했다. 가출을 한 이유가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실패를 해서다. 정말 순간적으로 너무나 큰 빚을 떠앉게 되신거다.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고 그때 아버지 지갑 안에 2만원이 있었다고 한다. 난 세상물정도 모르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기억으로도 중학교 2학년 때까진가 엄마가 ‘현준아 업혀!’ 이러면 엄마한테 업힐 정도로 그냥 집에서 귀여움만 받는 막내였다. 엄마가 우시면서 부도가 났다고 했다. 부도가 뭔지도 몰라서 그게 뭔데? 그랬더니 집이 망한 거라고 말씀하셨다. 집이 망했다는데 뭐 멀쩡한데 어디가 망했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도망가야 된다면서 아버지랑 새벽에 나가셨다. 엄마가 다시 금방 올 거니까 집에 있어, 이러고 나가셨고 형이 한명 있는데 형은 부모님이랑 상의를 한 다음에 해병대로 자원입대를 바로 해버렸다.

  

정말 혼자 남겨진 거다. 집에 혼자 있는데 너무 좋았다.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야 우리 집 비었어! 놀러와’ 라고 하며 친구들을 불러서 라면 끓여먹고 방에서 놀고, 다음 날 학교도 늦게 가고 그렇게 한 일주일 이주일 지나니까 전기가 끊기고 ,가스가 끊기고 물도 끊겼다. 딱지 붙이시는 분들이 문을 따고 들어오셔서 ‘뭐야 여기 사람이 자고 있으면 어떡해?’ 하면서 나가라고 막 깨우는 거다. 아저씨들 왜 남에 집에 신발을 신고 들어왔냐고 그러니까 ‘야 너네 집 이거 넘어 갔어’ 라고 하면서 가방을 주섬주섬 싸서 휙 던지면서 야 나가라고 했다... 무서우니까 집을 니왔다. 갈데도 없고 친구네 집에 며칠 묵었다. 친구집에 머무는게 한 이틀 삼일은 괜찮은데 일주일 가까이 되면 친구 부모님이 물어본다. 현준이 집에 왜 안 가냐고 친구에게 물으면 현준이네 집 망해서 우리 집에서 며칠 더 있어야 될거 같다 라고 대답을 한다. 그 어린 나이에 그게 정말 비수같이 꽂히더라. 아~ 나쁜놈! 우리 집 망했다는 얘기를 그렇게 쉽게 하다니... 이제 딴 친구네 집으로 간다. 거기서도 패턴이 똑같다. 그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 뒤로 친구네 집은 안가고 건물 옥상에서 좀 자다가 아침에 학교를 갔는데 누가 내 도시락을 싸오는 거였다. 이게 뭐야? 그랬더니 ‘이거 우리 엄마가 너 먹으라고 도시락 싸준 거야’ 너네 엄마가 이걸 왜 싸? 이랬더니 ‘너네 집 망했다고 너 밥 못 먹는다고’ 난 도시락을 바닥에 내던지고 누가한테 그 얘길 들었냐 그랬더니 ‘너 어저께 학교 안왔을때 담임선생님이 얘기했어’ 라고 했다. 그길로 교무실로 가서 울면서 선생님한테 ‘누가 이런 동정해달라고 그랬냐고... 우리집 망했다고 동네방네 다 소문내고 좋겠습니다’ 막 이러면서 선생님한테 덤볐더니 선생님도 놀라셨다. 교복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학교 안 다닐래요’ 그러고는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 고 1때였다. 그때는 교복을 던지고 딱 영화 ‘친구’ 처럼... ‘길에서 내랑 만나지 마소’ 그런 분위기였다. 그땐 무지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아주 주접이었다.

  

< 고 1에 노숙인이 되다... >

그렇게 나와서 갈 데가 어디있겠는가. 밖은 춥고 그냥 떠돌다가 서울역에 가서 노숙자 선생님 (그는 노숙자에게 선생님 호칭을 썼다) 들을 만나게 된다. 노숙자 선생님들에게는 추위를 피하는 방법, 밥을 먹는 방법, 잠을 자는 방법 이런 노하우들이 있더라. 그 방법들을 배웠다. 너무 추우면 병원 응급실 대합실에 가서 자라, 따뜻하니까... 이런 말씀도 해주시고, 그렇게 흘러 흘러 길거리에서 약 2년 동안을 노숙을 했다. 너무나 배가 고프니까 나중에는 먹는거에 대한 냄새만 맡아도 나도 모르게 냄새를 향해 내가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먹는걸 보고 빤히 쳐다본다. 그러면 열 명중에 여덟명, 아홉 명은 자기가 뭘 잘못했나? 하면서 먹질 못한다. 조금 착하신 분들은 아무 말없이 조심히 음식을 나누어 준다. 이렇게 얻어먹기도 하고 맥도날드 앞에 쓰레기통을 뒤져서 햄버거, 감자튀김 주워 먹곤했다. 그렇게 못 먹었더니 머리랑, 손톱이 다 빠지더라. 어느 날은 길에 앉아있는데 손톱 여기가 간지러워서 만지다보니까 손톱이 쭉 딸려 나오는데 안아팠다. 옆 손톱도 흔들려서 빼면은 쭉 진물이랑 같이 손톱이 빠지는 거다. 이게 죽는 병인가, 이게 문둥병인가 싶어서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에게 이거 안좋은거 같다고 그랬더니 의사가 볼때 정말 이상한 애가 온거다. 머리도, 이상하고 옷도 이상하고... 그런데 검사를 해주셨다. 절 앉혀놓고서 너 부모님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내가 너네 부모님은 혼을 내야 된다고 하셨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영양실조로 병원에 온 애가 있냐며 이건 학대라고 하셨다. 부도나서 감옥 가셨다고 그랬더니 이건 잘 먹으면 낫는거야 하시며 지갑에서 밥사먹으라고 삼만원을 꺼내 주셨다. 그 돈으로 밥도 먹고 압구정동으로 갔다.

  

< 압구정동에 웬 배고픈 거지가 나타나다... >

그당시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는 패션의 거리, 문화의 1번지였다. 로데오거리 앞 쇼윈도우에서 나이키 신발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는데 그 신발이 너무 신고 싶어서 계속 그 쇼 윈도우를 보고 있었다. 당시 그 나이때 학생들에게 나이키 신발은 그야말로 선망, 로망이었다. 압구정동에서 구정 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학교 등교하면서 돌아가는 쇼 윈도우를 봐야하는데 웬 거지가 그걸 자기들과 같이 보고 있는 거였다. ‘압구정동에 거지가 있구나‘ 이러면서 지나가고 그 친구가 하교하고 지나가는데 여전히 그 거지가 그걸 보고 있는게 아닌가. 며칠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보더니 한 명이 와서 물어보더라. 너 거지야? 그래서 ’어.. 처음부터 거지는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까 이렇게 됐어. 이름은 현준이야. 남현준‘ 친구는 이름을 안부르고 ’야! 거지야 일로 와봐‘ 그런 식이었다. 도시락도 좀 줄 때도 있고, 아니면 빵을 줄 때도 있고... 그 친구들이 수업 끝나고 떡볶이를 먹으러 간대서 한번은 ’야 나도 좀 같이 가면 안될까‘ 이랬더니 넌 창피해서 안 되겠다. 그러더니 돈을 주었다. 그 돈을 받아 무얼 사먹고 그랬다. 그 친구들은 그들의 인생이 있고 나는 내 인생이 있으니까 그렇게 쇼 윈도우를 보면서 이렇게 ’문워크‘와 ’팝핀‘ 춤을 추고 있었다. 쇼 윈도우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춤을 추고 있으니까 그 친구들 중에 한 명이 ’현준아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렇게 말을 걸어 왔다. 그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는구나 하면서 ’이거? 이거 되게 쉬워 이렇게 움직이면 되는 거야. 이렇게... 너 다리 두 개잖아. 나처럼 이렇게 해봐. 아무나 할 수 있어! 다 되는 거야‘ 그랬더니 ’야 이거 좀 가르쳐줘! 그래서 가르쳐 주었더니 ‘야 우리집 가자. 가서 밥 먹자’ 하면서 데리고 갔다. 그친구 집에 가서 따뜻한 밥을 먹는데 눈물이 났다. 그밥이 너무 맛있어서... 밥을 먹고 자기 입던 옷중에 안입는 옷을 주면서 좀 씻으라고.... 이제 날 씻기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사람이 됐다.. 그리고 친구들이랑 친해졌다. 춤을 가르쳐줘서 밥 얻어먹고, 빵 얻어먹고 그러면서 지냈다.

  

< 큰 인연... 이주노와의 만남.... >

한 친구가 ‘너 이렇게 춤을 잘 추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이주노씨 한번 만나봐라. 그래서 난 그아이가 이주노씨를 잘 아는줄 알았다. 왜 그걸 지금 얘기했냐고 하니까 그 뱅글뱅글 돌아가는 나이키 신발 파는 그 윗층에 이주노씨가 산다고 했다. 난 사무실에 약속도 안 잡고 찾아갔다. 진짜 똑똑 두들기고 문을 열었는데 이주노가 딱 거기 있는거다. 티비에서만 보던 연예인이 말이다. 그런데 그 분도 웬 거지가 들어오니까 ’어떻게 오셨어요?‘ 물어서 ’저 형님 밑에서 춤추면 진짜로 세계최고가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열심히 할 테니까 받아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하나도 안 물어보시고 ’어 그래 그러면은 연습실 가서 연습해. 형이 조금 있다 보러 내려갈게‘ 하셨다. 한방에 연습생이 된거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갈려는데 머리 모양이나 옷, 이런 모습을 보시고 ‘차림이 왜 그러니. 머리 스타일이랑?’ 물었다. 집이 없어서 길에서 자고 먹고 해서 그런데요 그랬더니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 연습실에다가 숙소를 만들어줄 테니까 연습실에서 살라고 했다. 연습실도 얻고 내 보금자리도 생긴 거다. 이제 그분이 내려오시면 멋지게 보여드려야지 하고 진짜 연습을 많이 했는데 6개월 만에 오셨다. 바쁜 시기기도 하셨고 ‘어 내려가서 연습해’ 이렇게 애기 해놓고 지나다가 복도에서 만나면 ‘너 누구니? 그러면 형 어저께 들어왔던... 하며 ’아 형이 내려가서 볼게‘ 하고는 한달 쯤 뒤에 ’음 누구세요?‘ 이런 통성명을 몇번 했다. 그래도 잘 기억을 못하셨는데 6개월 만에 정말 오셨다. 연습생들중 마지막에 나와서 춤을 딱 추는데 ’문어야, 일로 와봐‘ 이러셨다. 이렇게 막 문어처럼 춤을 추니까 그때 내 별명이 문어였다. 이름을 물으셨다. ’현준입니다‘ 했더니 ’너는 다른 거 하지 말고 이것만 해‘라고 말해주셨다. 그때부터 그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하다.... >

1997년 당시 이주노가 라디오 DJ를 했다. 라디오 1부와 2부 사이에 인터미션을 채워주는 시간이 있었다. 그걸 전에는 마술사가 나와서 마술도 하고 경품추첨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이주노가 누구인가? 굉장히 빨리 춤의 문화를 시작하신 분이지 않은가. 그는 전문 댄서가 춤을 한번 보여주자는 생각을 하고 우리에게 ‘내가 일주일후에 1부랑 2부 사이를 춤으로 만들거야. 그러니까 연습해라’ 라고 했다. 그 일주일 동안 정말 피나게 연습했다. 그리고 무대에 서게 됐는데 그때 잘췄던 형들은 다 가운데 서고 난 조명도 비치는 않는 맨구석에 자리에 섰다. 굳이 사람이 안서도 되고, 화분 같은거 세워놔도 전혀 문제가 안 되는그런 자리였다. 이주노의 입장에서는 ‘어린 친구지만, 지금 막 들어왔지만 그래도 똑같은 기회를 줘보자’ 라고 생각했던 거다. 무대 끝에 섰을때 너무 좋았다. 처음으로 조명이 있고 마룻바닥에 정상적인 관객이 있는거였다. 정말 프로만이 선다는 그 무대에 선건데 무대에 앞뒤가 어디있나. 가운데면 어떻고 끝이면 어떠냐고 생각했다. 똑같은 무대 위에 있는데... 너무나 벅찬 가슴에 음악 큐사인이 나오자마자 온 힘을 다해 춤을 췄더니 같이 맨 끝에 날개를 맞추는 친구들이 날보러 ‘현준이 미쳤나봐. 왜 저러냐’ 한거다. 나랑 똑같은 합을 맞춰야하는 것이라서... 아니면 밸런스가 안 맞으니까. 공연이 끝나니까 친구들이 와서 막 뭐라고 그랬다. ‘너 돌았어? 네 가족이라도 왔냐? 누가 보러왔어?’ 그러면서 왜 이렇게 오바를 하냐. 우리는 끝에 서서 보이지도 않으니까 형들한테 안 혼나게끔 그냥 합만 잘 맞추면 된다.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했다. 그래서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우리 아무도 안볼 수도 있어. 끝에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야 이건... 너도 제일 좋아하는 일이잖아,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왜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냐고... 난 이렇게 할래. 춤추는 게 너무 행복해’ 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도 안보는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정말 보고있었다. 그 무대를 연출했던 연출가 선생님이 보신 거다. 꼬마가 막 오바하니끼 재밌었을 것이다. 그 감독님이 이주노에게 ‘저 끝에 있는 저 친구는 새로 들어왔어? 귀엽네. 되게 열심히 해. 내가 저번에도 저렇게 하는걸 봤는데 오늘도 보니까 진짜 열심히 한다고. 저런 친구는 잘 될거야’ 그때부터 이주노가 절 유심히 보셨다. 전 누가 보던말던 계속 열심히 했다. 그래서 다음번 무대를 설 때는 무대 중앙으로 한 칸 들어갔다. 이제야 관객들이 보이더라. 관객들이 보이니까 더 열심히 했다. 그러니까 또 다시 한칸 안으로... 이제는 정말 주인공이랑 가까이 있게 되었다. 가끔 여유가 있으면 주인공이랑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는 자리까지 왔다. 그래서 열심히 했더니 결국은 무대의 가운데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이 자리까지 오면서 뼈저리게 느낀게 있는데 우리앞 사이사이에 안 보이는 벽이 있다. 이 벽은 뭘로 무너트릴 수 있냐면 내 경험으로는 돈도 아니고... 어떤 잘하는 기술, 기교도 아니더라. 그건 바로 ‘진정성’ 인것 같다. 진심으로 정성을 다한다는 말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진정성을 더하고 더하면 보이지 않는 이 벽이 무너져서 결국은 내가 원했던... 무대의 가운데에 설 수 있는 내 꿈의 자리로 올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 마무리말 >

와이프(국립창극단 출신 전통가수 박애리) 를 만나서 결혼을 한 것도 꿈의 이상형을 만나서 결혼을 한거다. 사람들이 다 그러더라. 팝핀 현준이 결혼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만약에 한다면 클럽에 가면 볼 수 있을만한 섹시한 여자랑 결혼하지 않을까! 이상형이 그러지 않을까! 라고들 이야기 한다. 사실은 정반대다. 단아하고 우아하고 그리고 정말 속이 꽉 차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와이프를 처음 만난날 공연 연출가가 공연 때문에 우리 둘을 섭외한 거였다. 와이프가 조금 늦게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박애리가 딱 들어오는데... 박애리가 진짜로 슬로우모션으로 들어오는것 처럼 보이는 거다. ‘우와, 저런 여자가 있구나’ 하며 매니저한테 ‘어때? 저런 여자가 진짜 멋있는거야’ 그랬더니 그 매니저는 ‘형 누구? 저 아줌마?’ 이러는 거다. 그러면서 중국을 많이 가서 사람이 좀 미친거 아니냐고 했다. 어쨌든 꿈과 목표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막연한 전진이 아니라 그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처음만난 이상형 처럼... 또 처음 만난 내 꿈처럼.. 설레임을 가지고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그 꿈은이루어 진다는것을 난 경험했다. 마지막으로 외국에서도 많이 공연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곡에 맞추어 팝핀 댄스 솔로 작품을 보여드리겠다. 초청해 주시고 경청해 주셔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