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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KIST Opinion

[ET단상] 4월 과학의 달, 메디치가(家)의 철학을 되새기며(이병권 원장 기고)

 

[ET단상] 4월 과학의 달, 메디치가(家)의 철학을 되새기며

 

 

이병권 원장

이탈리아 피렌체는 잘 알려진 것처럼 당대의 수많은 천재가 재능을 꽃피운 르네상스 발상지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파도바에서의 교수 생활을 접고 피렌체로 옮겨온 후 지동설 완성, 고배율 망원경 제작 등 탁월한 성과를 연이어 발표했다.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브루넬레스키 등 당대 천재의 재능이 발현된 곳도 피렌체였다. 과연 피렌체의 무엇이 이들의 잠재력을 깨운 것일까. 여기에는 당시 피렌체를 통치한 메디치 가문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창조 재능은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을 때 비로소 만개할 수 있다. 뛰어난 인재에게 어떻게 오롯이 창의 활동에 전념하게 할 것인가. 이는 예나 지금이나 연구 활동을 지원할 때 고려해야 할 변치 않는 본질이다. 최근 정부가 중점을 두고 있는 '연구자 중심 환경 조성'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역사에서 천재들의 창조 활동 후원은 메디치가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의 왕족 등 지배 계급은 과학자와 예술가를 직접 고용하거나 후원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원을 받았다. 조선 후기 대표 세도 가문이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의 열렬한 후원자였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막대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지배층이 과학과 예술을 지원한 것은 단순한 후원 이상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가문의 정치·문화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통치 수단의 일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메디치가도 은행업으로 성공한 상인 집안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어 했다. 천재들의 성과 창출에 기여함으로써 공화정이던 당시 피렌체에서 정치 입지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르네상스라는 위대한 역사 구심점이 된 메디치가의 후원을 설명할 수는 없다. '과학의 달' 4월을 맞아 그 당시 창의·혁신의 요람 피렌체와 메디치가의 철학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메디치가는 스스로 학문, 지식, 문화예술 그 자체를 이해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대로 알아야 올바로 지원할 수 있다는 굳건한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의 작품,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는 그러한 철학의 대표 산물이다.

 

또 메디치가는 최고 인재에게 그에 걸맞은 최상의 예우를 보장하였다. 갈릴레오에게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당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액의 연봉을 지원했다. 여기에는 자긍심이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믿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메디치가의 철학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창조 활동의 자율성을 존중한 것이다. 작품마다 메디치가에서 원한 기본 방향은 있었지만 진행 과정에서 천재들 나름의 해석과 관점을 적극 수용하였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요구가 이들의 창의성 발휘를 저해할까 늘 경계했다. 마치 오늘날의 '무빙타깃' 개념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정신과 철학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시대라 불리는 르네상스를 만들어 낸 원동력이라 생각된다.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간 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1933년 제1회 과학데이 행사에서 울려 퍼진 '과학의 노래'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해 민족 역량을 일으키고자 한 당시의 뜨거운 희망과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과학기술과 창의 인재에 대한 국민 기대는 변함없다. 창의·혁신을 위한 아낌없는 후원을 통해 르네상스를 꽃피운 메디치가의 정신과 철학을 뒤돌아보자. 4차 산업혁명이라는 21세기 르네상스를 앞둔 대한민국이 되새겨야 할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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