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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KIST Opinion

[기고] 과학기술로 한반도에 봄을 가져오자

 

차세대반도체 연구소 장준연 소장

춥고 어두웠던 칙칙한 단색의 겨울이 지나갔다. 강해진 햇살이 이름 모를 들꽃에서부터 봄의 전령사인 개나리, 진달래를 개화시켜 어느덧 들판을 울긋불긋 아름다운 색으로 채운다. 이럴 때면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떠오른다.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현실과 이를 극복할 아무런 힘이 없는 무기력함에 지친 한 지식인의 눈에는 인간세상의 질곡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때만 되면 아름다움의 향연을 벌이는 자연의 위대함은 오히려 사치이고 질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은 한반도에 봄을 가져다주는 듯 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빛을 되찾아(光復) 온지 불과 3년 만에 6.25 전쟁이라는 비극이 일어났고, 오늘날까지도 한반도를 무겁게 짓누르는 분단의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지난 70여 년간 우리 국민들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발전을 이룩했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불과 80달러로 아프리카 가나의 GDP 170달러의 절반도 안됐다. 이런 불모지에서 오로지 잘살아보자는 일념으로 경제발전에 매진해 2017년엔 2만 7000달러로 1960년에 비해 대략 340배 상승했고 수년 내에 3만 달러 달성이 예상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에 가입한 190여 개국 가운데 1인당 GDP가 3만 달러 이상인 국가는 불과 27개국이며 마냥 부러워만 했던 이웃나라 일본이 3만7000달러로 이젠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눈부신 발전에는 우리 선배 세대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 파견, 베트남 전쟁 참전 그리고 중동 건설 현장 등 험지에서 일하며 벌어들인 종잣돈으로 제조업을 일으키고 기술개발에 몰두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가 간 치열한 경쟁과 내부 사정 등으로 경제발전을 견인했던 자동차, 철강, 조선, 반도체 등 주요 산업들이 최근 어려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제조업 가동률이 70.3%로 글로벌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69.9%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마지막 보루인 반도체 산업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더구나 향후 성장을 이끌 미래 성장동력 산업발굴이 부진하여 지속적인 경제발전에 큰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남북 정상들의 판문점 회담 및 판문점 선언으로 정치, 안보 분야뿐 아니라 침체에 허덕이는 한국 경제에도 새로운 활력을 가져오리라 여겨진다.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미북 회담이 가까스로 재개됐지만,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불과 수 개월 전만 해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와 이에 대항하는 북한의 끈질긴 대량살상무기 개발로 한반도는 전례 없는 극도의 위기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지난 겨울, 평창 동계올림픽을 전후해 북한 입장의 변화가 감지됐고, 올림픽이라는 인류의 축제를 통해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됐다. 미북 회담 일정이 살얼음 판 위를 걷는 정국이지만, 우리는 이제 더 멀리 더 넓은 시각으로 다양한 협력을 마련해가야 할 것이다. 

 

올림픽을 통해 조성된 문화·체육 분야의 협력이 정치적 화해분위기에 물꼬를 텄고, 비록 속도가 늦춰지더라도, 우리 과학기술인들은 어떻게 이 흐름을 이어갈지 고민해야할 것이다. 북한의 과학기술 시스템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국방기술 분야에서는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외 민생관련분야나 순수 과학분야는 아직 불모지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협력이 가능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번 정부가 국가 R&D의 핵심지표 중 하나로 국민생활에 밀접한 건강, 환경, 재난·안전 분야에 대한 연구 강화를 꼽았는데, 북한과의 협력에서도 북한 주민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분야에서 우선적인 협력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3대 민간부분의 협력은 북한 주민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으므로 북한과 남한의 교류를 한발 앞장서 이끌어나가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도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고 있다. 잠시 꽃샘추위가 찾아왔다고 해서,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다. 물론 섣부른 예단이나 허황된 통일의 꿈은 철저히 경계해야겠지만 과거의 흑백 논리,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서 모처럼 찾아든 봄기운을 몰아내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정치·경제·문화, 그리고 과학기술계와 같은 사회 각 분야가 각자의 몫을 해내며 다가오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을 때, 비로소 이 땅에 봄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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