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창의포럼에서는 대한민국 대표 사진작가 ‘김중만’을 초청했다. 1954년 생으로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71년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로 이주한 후 프랑스로 유학,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과를 수료했다. 이후 사진의 매력에 빠져 1975년 니스의 “쟝 피에르 소아르니”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사진작가로 데뷔한다. 1976년 <프랑스 오늘의 사진 80인>중 최연소 작가로 선정되었고, 1977년 프랑스 ARLES 국제사진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다작의 작가로 소재도 인물·풍광·동물·꽃 등 다양하며 패션사진, 광고, 영화 포스터와 수많은 스타 사진을 찍었다. 2006년부터 상업 활동을 중단하고 예술 사진에 집중하고 있다. 2010년대부터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과 자연 속에 깃든 한국인의 정신을 표현함으로써 팝적인 대중성과 클래식한 풍모 모두를 완성도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영감을 주는 공간이었던 아프리카에서 선행도 열심히 베풀고 있다. 아래는 창의포럼 강연내용의 요약이다.

 

< 이야기를 시작하며... >
단정하지 않은 머리, 서양 여성얼굴이 프린트된 흰색 V넥 티셔츠와 회색빛 양복상의, 종아리가 훤히 보이는 검은색 7부 치마바지, 귀걸이 그리고 목덜미, 종아리, 손등에 푸른색 타투가 가득 새겨진 모습(온몸에도 타투가 새겨져 있을 것 같다)... 그는 우리가 흔히 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습과 특유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우리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김중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도 아침 7시에 잤는데 강의 있다고 자꾸 깨워서 그 강의 안 나가면 안 될까 생각을 했다. 뭔가 일이 있으면 내 몸에서 자꾸 안 받아들이는 거 같다. 특별하게 할 일이 없어서 지난밤에는 미드를 봤다. 1편에서 10편까지 보니까 아침 7시더라. 그래서 강의가 있으니까 이제는 자야 되겠다싶어  자고 오후 2시에 일어나 이곳에 왔다. KIST에서 가까운 전농동에 살고 있다. 금년 나이 64살, 환갑이 지난 지 4년 됐다. 3번 결혼했고 결혼마다 아이들이 다 딸려서 아이들만 넷이고 손녀가 셋. 손자가 한명이다. 내가 사람 복은 엄청 많은 것 같다.

 


< 영혼과 영혼을 이어 주는 다리.... >

김중만이라는 작가가 세상을 보는 아주 간략한 개념을 몇 글자로 알려드리려 한다. 우리 사회, 우리 세상의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는 숫자의 싸움이다. 사람과 사람의 숫자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게 정치다. 너무 삭막하다. 경제는 무엇이냐. 경제라는 것은 사람의 숫자와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다. 문화는 무엇인가. 문화는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다. 마지막으로 예술이 무엇이냐. 예술은 사람의 영혼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예술을 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오랜 연습과 기다림과 끊임없는 복습을 하고 나서 얻어지는 하나의 결과물이지만 그걸 넘어서 정말 미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대충 어떻게든 사람만 모으면 된다. 좋은 예로 6개월 전에 일어난 “어떤” 일과 상관없이 유권자의 25%가 같은 세력에 빨간 도장을 찍었지 않은가. 경제도 마찬가지로 정말 냉혹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과 숫자만 동원하면 된다.

예술은 위대하기 때문에 불가능이란 단어를 쓸 수 없는 영역이다. 여러분들도 불가능을 만나면 끊임없이 아마 좌절도 하고 또 부딪히고 또 마음 아파하는 많은 시간을 보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된다. 과학에서는, 예술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종교는 가능과 불가능의 개념이 아니고 무한대의 개념이다. 과학은 창의력과 연관이 된다. 창의력은 어떻게 만드는가. 40년 동안 예술을 한 아티스트로, 사진작가로 살아오면서 창의력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이런 거다. 창의력은 가장 불안정한 것에서 시작한다. 창의력의 출발은 어떤 하나의 과제나 어떤 아이템이나 아이디어를 놓고 우선은 그것을 타이틀로 해놓고 실현 가능한 쉬운 걸로 먼저 답을 생각한다. 가능하면 불안한 것은 좀 옆으로 피해간다. 예술가로서 창의력이라는게 그 출발점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을 깊이 보는 게 나의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들하고 조금은 출발점이 다를 수 있다. 여러분들은 아마 수학으로부터, 어떤 기호로부터 또 어떤 입증으로부터 시작을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비수학이다. 입증할 수 없고 추상적인 것이다. 자기가 “이것이다.”라는 답을 미리 내놓고 할 수 없는 게 예술이다.

 

< 스무살.... 나의 사진.... >
여러분들이 지금 보신 것은 내가 스무살 때 처음 찍은 사진하고 동영상이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본 사람이 있는가. 스무살 때 생각해보니 우리 인간이 가장 본능적으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섹스하는거다. 그때 난 이렇게 사진작업을 했다. 간단하다. 사진 찍을 곳에 먼저 가서 구상을 한다. 그리고 니스 날씨가 워낙 좋은데라 크게 변함은 없지만 빛도 한번 재본다. 다음은 미대 친구 중 여학생들에게 ‘사진을 좀 찍어야 되니까 모델을 좀 해달라’ 라고 요청하고 오케이하면 정해놓은 장소로 데리고 간다. ‘뭐 가져오니?’ 그러면 ‘그래 치마입고 와’ 라고 하고 ‘저기 누워서 팬티 좀 벗어 봐.’ 그런다. 물론 우리하고는 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에 대해서 갑자기 막 놀라고 도망가거나 그만 두겠다고 했던 그런 기억은 없다. 여하튼 제 정신은 아니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 팬티를 벗으라고 하고 여러 포즈로 찍고 내일 만나기로 하고 나는 바로 암실에 가서 필름 현상을 해가지고 프린트를 한다. 여러분들이 본 사진 대부분이 내가 1975년에 사진을 시작한 첫 해에 찍은 사진들이다. 그 다음날 프린트를 해서 점심시간에 갖다 준다. 그러면 “아 얘가 변태는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는지 “다음에 또 할게.”그러는 거다. 이런 방법으로 내가 다니는 학교 니스 국립미술대학교 여학생들을 한 30명 정도 팬티를 벗겨서 찍었다. 만일 순수함이라는 것을 상대방에 전해주지 못했을 경우에는 30명이라는 숫자가 절대로 안 나온다. 사실은 불안했다. 이거 할 수 있을까. 재들이 내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해변가에 막 돌아다니는데 해변에 누워 팬티 벗고 치마 다 열고 있으라면 있을까. 안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술을 해야 된다. 내가 이 작업을 통해서 사진이 무엇인가를 배운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힘이다. 즉, 소통이다. 그 사진을 전해줄 때 받았던 그 친구들의 느낌이 참 좋았었고 그리고 계속 내가 보고자 하는 세상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그대로 사진으로 옮겨놓는... 조금 정석적인 사진의 출발은 아니었다. 만약에 지금이라면 못할 거 같다. 한 사오년전에 저 앵글로 한번 찍어볼까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 역시 우리의 마음이 얼마만큼 진실성이 있는가에 따라서 그게 가능하고 그렇지 못한 게 있는 것이다.


< 전농동에 일터를 마련하다.... >

한 100평정도 되는 스튜디오가 청담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앴다. 작년 10월쯤 갑자기 이 일이 하기 싫어졌다.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그래서 조금 쉬어야겠다하고 청담동 스튜디오에 있는 모든 책과 원고와 소품들과 카메라들을 창고에 옮겨놓았다. 제자들도 다 내보내고 혼자서 가만히 백수가 돼서 너무 기분 좋게 놀았다. 그런데 작년 10월, 11월, 12월 세 달 동안 사진 6점 정도를 팔았는데 그게 한 4억 원이 되더라. 집사람이 아파트를 하나 사줄 테니까 거기 가서 일하라 해서 요즘은 전농동 25평 아파트에서 조그만 아뜰리에를 차리고 일을 하고 있다. 좀 전 사회자께서 소개한대로 연예인들도 찍고 상업사진도 하고 영화도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찍지는 않았다. 또 그렇게 많은 상업사진이나 광고사진을 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했다. 그러면 왜 이 작업들을 했을까. 2000년도에 아프리카에서 가족들하고 1년 동안 동물사진을 찍고 서울에 돌아와 보니 내 소유의 집이 없더라. 나이 오십이 됐는데 가족은 있는데 집이 없는 거다. 그래서 사회와 타협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명함을 만들고 스튜디오를 냈다. 한 3년 일을 하니까 연간 10억 원을 벌었다. 그리고 한 7년 정도 되니까 연간 거의 18억 원을 벌게 되었다. 예쁜 배우들 만나고 찍고 초반에는 여자 배우들과 모델들을 많이 찍었다. 그러다 여자 배우들하고 모델들은 사진 한 장을 찍으면 거기에서 메이크업 바꾸고 옷 바꾸고 하는 데에 시간이 엄청 걸려서 남자 배우 쪽으로 찍는 영역을 좀 넓혔다. 그리고 영화포스터 좀 찍었다. 2007년에 찍은 게 괴물, 오래된 정원, 멋진 인생, 타짜, 달콤한 인생 등 이다. 이정도 찍었으면 많이 찍은 거다. “어느 작가의 손을 타면 잘된다.”라고 소문이 나면 완전히 줄을 선다. 하루에 2000만원씩 받는다. 꽤 수입이 괜찮다. 근데 실제로 따져보면 괴물은 100억짜리인데 난 2000만원을 받았다. 전체 예산에서 보면 500분의 1이다. 사진이라는 것 생각처럼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 사진 작가의 고민..... >
대부분 젊은 작가들이 사진전을 열심히 준비해서 전시회를 열면 커플들이 와서 보면서 남자가 이야기한다. “저거 내가 저렇게 찍을 수 있어” 그 말을 듣는 작가는 그냥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나름대로 정말 죽어라고 준비해서 어렵게 계약해서 벽에다 걸어놓았는데 그 마음 추스르기가 어렵다. 사진의 큰 장점이 생산성. 무궁무진한 빠른 생산성이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고자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내가 경험한 생산성은 하루에 한 스무장 정도 나오는 날. 인생에서 한번 밖에 없었다. 하루에 2000장 찍는 날도 수도 없이 있었다. 보통 일주일에 열심히 찍으면 한 오천에서 칠천장을 찍는다. 거기에서 다섯장 정도 작품이 나오면 정말 해피한거다. 생각처럼 안 되면 좌절의 시기가 온다. 나는 분명히 이걸 보고 찍었는데 왜 생각처럼 안나오지? 분명히 나는 다른 빛이었는데 결과는 왜 이렇게 나왔을까. 자신에 대해 어떤 능력에 대해서 끊임없이 싸움을 하다 대부분이 그 싸움에서 무너진다. 시를 쓴다고 소설을 한다고 치자. 물론 내가 시나 소설을 폄하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시는 일년 동안 쓴 것을 인쇄 들어가기 하루 전에 제목을 바꿀 수 있다. 또 단어 몇 개를 다른 단어로 바꿀 수가 있다. 사진은 한번 누르면 그 순간 그냥 90프로가 결정된다.

 

< 뚝방길 위에서 이웃을 만나다..... >
내가 살고 있는 전농동에서 청담동으로 갈 때 중랑천 뚝방길이 있다. 거기에 건축물 폐자재하고 상하수도 처리장이 있는 그 길을 9년 동안 찍었다. 2004년도에 처음 이 사진속의 나뭇가지를 봤다. 환경미화원 터에 있는 나무인데 자꾸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 같더라. 그래서 2004년도에 처음으로 이 나무하고 말을 시작했다. “내가 너를 찍어도 되니?” 하는 것과 “내가 너를 찍을 자격이 있니?”라는 두 가지를 4년 동안 물어봤다. 2008년도 4월에 찍어도 된다고 해서 그래서 차를 옆에다 세우고 이 나무를 찍었다. 찍는데 이 길에서 일하는 우락부락한 업체 아저씨들이 방해를 많이 했었다. 3일 정도 찍으니까 옆에 있는 나무가 나도 있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한 달을 찍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때가 4월, 5월 넘어갈 때라서 겨울나무에서 봄 나무로 바뀌는데 나무 모양이 달라진다. 그러면 한 시즌만 한번 찍어보자. 봄까지 찍고 여름까지 찍어보니까 가을은 또 달랐다. 그럼 한 1년을 찍어보자 해서. 1년을 찍고 나서 금년까지 9년을 찍었다. 이것을 2m X 1.5m 정도 되는 한지로 프린트를 한다. 에디션을 다섯 개씩 하는데 한 장에 오천만원에 팔고 에디션 두 개짜리는 1억에 판다. 이제 그 길에 계시는 분들은 다 안다. 여름에는 생수도 갖다 주고 겨울에는 100원짜리 커피도 자기네들 방에서 마시게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 길에 먼지가 많으니까 살수 탱크가 있는 트럭이 있다. 트럭하시는 분이 작년에 8년 만에 내 앞에서 살수를 딱 스톱 시켰다. “아 내가 드디어 이 뚝방길을 점령을 했구나. 모든 분이 다 허락을 해주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서 같이 일하시던 노동자분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오래 할 수 있었는지도 좀 의문이 가고 여하튼 나한테는 어떤 작가로서의 터닝포인트가 된 작업들이다. 그래서 좀 알려지게 됐고 아마 금년 미국의 유명한 세계적인 출판사에서 조만간 책이 나오도록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가격이 2배로 올라갈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의 시장이 생각하는 것 보다 외국에는 엄청 크다.

 

< 카메라로 그려낸 수묵화..... >

뚝방길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나무마다에 상처가 있어서이다. 그 모습이 우리 인간들 모습 같아서, 때로는 내 마음 같아서 정말 나무에게 열심히 물어 보았다. 한 장의 사진도 안 찍고 정말 매일같이 4년 동안 1,200번 정도 나무에게 물어보았다, 처음엔 한장만 찍으려 했는데 시즌을 찍게 되고 그것이 해을 넘기고 이렇게 5년을 찍으니 다 찍은 것 같았다. 거기서 멈추려 했는데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25분짜리 강연 ‘토크쇼’에 나가게 되었다. 첫 번째 연사가 뉴욕 모마뮤지엄 그렌날리 관장이었다. 이분이 내 강의를 들을 것을 생각하니 강의준비에 많이 떨었다. 실제 토크쇼에서는 그렌날리를 의식하지 않고 여러분들에게처럼 편안하게 떨지 않고 작품을 보여주며 나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 했다. 보름 정도 후 그렌날리가 보낸 편지가 왔다. 내용은 “당신 작업을 감동 있게 보았다. 전시 준비되면 연락해라.”였다. 이런 연유로 다시 뚝방길 사진작업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전에는 1, 2마리 밖에 없던 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들이 카메라 앞에 앉았다. 심지어 저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주었으면 생각하면 그 자리에 앉는 새가 있었고 하늘을 지나가는 새도 있었다. 이렇게 영감을 받아 작업이 될 때에는 며칠 밤 잠을 자지 못한다. 올해까지 이 작업을 진행했고 한지에 프린팅을 했다. 카메라로 수묵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좋은 시간이었다.

 

< 전통 산수화에 도전하다... >
다음 작업은 사진으로 전통 산수화를 그리는 작업이다. 산수화 하면 조그만 사이즈의 난, 꽃 등 사군자 등을 한지에 그리는 전통화법인데 난 스케일을 키워 카메라로 전통산수화를 그리고 싶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카메라를 수소문하니 스위스에 1억5천만 화소의 카메라가 있었다. 가격이 1억 5천만 원이었다. 그 카메라를 사서 2012년부터 작업을 진행해 15점을 완성하였다. 뉴욕의 모마, 파리의 그랑팔레, 런던의 테이트모던, 이렇게 세계 3대 뮤지엄이 있다. 2013년 엔디워홀이 전시를 했던 그랑팔레로 부터 초대를 받았다. 15점의 작품을 뮤지엄 바닥에 깔았다. 자세히 보더니 이건 사진이 아니라 회화 아니냐고 했다. 불어로 자세히 설명하니 이해하고 미안해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랑팔레로부터 “당신을 커미티 전원의 만장일치로 2016년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하고 2016년 11월부터 2017년 2월까지 기념 전시회를 개최해 주겠다.”라고 연락이 왔다. 세상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2015년 2월 28일 나에게 가장 행복한 편지를 보내준 사람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한국 정부와 무슨 일이 있느냐? 왜 당신 얘기만 하면은 문화부 직원들이 다들 도망가느냐?”고 물었다. 그랑팔레에는 국가대 국가의 계약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곳이다. “당신을 프로그램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해서 너무 아쉽다.”라는 가장 불행한 편지를 받았다. 보이지 않게 4년 동안 엄청난 피해를 본 셈이다. 이 사진들이 파리 대형전시장 겸 박물관 그랑팔레를 거쳐서 나오면 그게 1억원이 돼서 나오는게 아니고 10억원이 돼서 나온다. 그리고 전세계에서 그 수요가 엄청나다. 지난 정부와 친하지 않은 내 탓이라 생각한다.

 

< 구치소와 정신병원... 그리고 내일.... >
마약을 해서 구치소도 가보고, 마약을 하지 않았는데 한다고 정신병원에도 들어가 보고, 또 추방도 당해보고 여러 가지를 젊은 시절에 겪었다. 내가 좀 둔해서 추방을 당해도 한 이틀정도 있다가 “아 내가 지금 상황이 심각하구나.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을 조건이 상황이 아니구나.” 하는 정도로 낙천적이었다. 뭐 일이 있으면 그래. 마약했으니까 구치소가서 살지 뭐... 되게 좋았다. 55일 동안 책도 110권 읽고 나오고 5대 범죄라고 해서 강도, 살인 등 제일 살벌한 수감자들이랑 같이 있는데 내 방이 나중에는 선빵이 되가지고 애들이 다 너무 착하게 교화되었다. 작가로서 좋은 경험이다. 정신병원은 구치소보다 더 심했다. 구치소는 내가 어떤 잘못을 한 거를 안다. 들어가면 고참 수감자들이 몇 년, 몇 달 사는지를 다 얘기 해준다. 전과들이 너무 화려하니까 다 법률가 뺨친다. 마약을 하지 않았는데 담당검사가 서울시립정신병원에 날 입원시켰다. 80명이랑 보름동안 있었는데 약을 안 먹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아침에 정말 영화처럼 다 입 벌리고 제일 많이 먹는 애부터 한 알 짜리가 쫙 줄 서 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이 대한민국이 나를 예술가로 만들려고 작심을 했구나.” 이것은 돈 주고도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하루에 1리터씩 피를 뽑힌 적도 있다. ‘90년대 초인데 국과수가 요즘처럼 발전이 안 된 때이다. 요즘은 1시간이면 마약테스트 결과가 나온다. 그때는 보름이 걸렸다. 사진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그런 어떤 관찰자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병원에서 만난 80명 중에 정신이상이 있는 친구는 10프로밖에 안되었다. 나머지는 왜 그럼 여기 있을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관찰해보니 ‘내일’이 없어서 였다. 그 이후 어떤 생각을 갖게 됐는가 하면 “난 오늘만 살자” 주의자이었는데 내일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이더라. 그 친구들한테는 갇혀있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였다. 그냥 내일이 없어서, 갈 곳이 없어서, 할 일이 없어서 그냥 미쳤다고 드러누운 거다. 내가 그동안 너무나 오만하게 살지 않았었나. 너무나 자만으로 살지 않았나. 반성을 했다. 나를 처음 마약으로 잡아간 검사님한테도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 한 장 건지기가 너무 어렵다.... >
한두 달 전 문재인 대표님한테 ‘김작가는 뭐하고 살고 싶어?’ 그래서 ‘아 저는 그냥 사진 찍고 책 읽고 대마초 피고 음악이나 듣고 사는 게 제일 좋습니다.’ 이러니 웃으시더라. 만약 조선시대였다면 그분은 곧은 선비고 나는 굉장히 삐딱한 한량인 셈이다. 아무튼 예술은 정상적으로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됐든 자기의 혼이 정말 미치지 않고서는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하는 것을 하나의 어떤 특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 업보고 어려움이고 좌절이다. 1000장을 찍어서 한 장 정도를 오케이 했을 때 나머지 999장을 보면서 절망하고 좌절한다. 왜 이거밖에 안했을까. 왜 내가 이 시간에 그 빛을 놓쳤을까. 하는 것들로 절망한다. ‘보그’에서 일하는 영국 출신 프랑스의 유명 패션사진가 ‘스티브하이트’ 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에게 물어봤다. 내가 400장 정도 찍어 한 장 정도 건진다고 했더니 “난 700장 찍어.” 그러더라. 그게 답이다. 1000장을 찍어도 한 장이 나올까 말까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 EAST... 동양을 찍다.... >
‘이스트’ 라는 제목의 큰 사진을 찍고 있다. 뭐를 찍는가 하면 ‘동양’ 을 찍는다. 서양 작가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들을 이기려면 그들이 절대로 보지 못하는 거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동양을 찍는 거다. 한국을 찍고, 나의 뿌리를 찍고, 동양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찍는 대형작업이다. 결과물로는 그 사이즈가 2.5m X 5m 짜리 한지로 나오게 됐다. 그 작품을 독일 창고에 매달 꽤 많은 돈을 주고 보관하고 있는데 조만간에 전시회 할 기회가 있으면 가져와서 전시를 할 계획이다. 일단 17개 만들었는데 제작비만 한 점당 7,000만원 들었다. 프린트하고 디아섹 입히고 나무프레임을 했다. 17개 만들어 놓고 돈이 떨어졌다. 이제 ‘고비사막’만 남았다. 고비사막까지가 내가 보는 동양이다. 시작은 베트남의 하롱베이부터 중국의 장가계, 황산, 백두산 그리고 한강, 제주도, 일본의 야쿠시마 섬까지 찍었고 이제 고비사막만 찍으면 이 시리즈는 스무장 짜리로 끝난다.

< 마무리 말.... >
어떻게 하면 잘 놀까. 하는 게 나의 계획이다. 여지껏 찍은 사진은 800만장이 좀 넘는다. 아카이브 하는 데만 한 4년 걸린다. 아직도 내가 뭐를 찍었는지 다 파악을 못하고 있는 상태고, 여태까지 정말 그냥 끊임없이 작업을 했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산수화나 수묵화를 사진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 내가 처음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많은 작가들이 했지만 이걸 이제 어떤 식으로 어떤 좋은 곳에서 보여주느냐.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평을 받느냐가 중요하다. 이외에도 구름 찍고. 풀 찍고, 꽃 찍고, 사막 찍고 그 다음에 빌딩 찍고, 그래서 동시적으로 한 7가지 주제를 매일같이 촬영을 한다. 이것들이 모아지면 전시회를 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자선전시를 통해 한 10년 동안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고 베트남, 아프리카 등에서 꾸준히 아이들을 돕고 있다. ‘이스트’ 작업하고 ‘뚝방길’ 작업은 정말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 총력을 기울여 한 작업들이고 나머지는 매일 같이 노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이다. 매일 같이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까’하는 게 나의 주된 관심사다. 아무튼 김수근 선생님이 멋있게 지어준 이 공간에서 여러분들 만나 뵙게 되어 너무 영광이었다. 감사드린다.

Posted by KIST 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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