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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가 우거진 KIST 둘레길.

이곳을 걷다 보면 KIST 역사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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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은 지난 2006년 2월 KIST 40주년을 맞아 개관했습니다.

이전에는 대통령이나 귀빈들이 묵는 영접실로 쓰였던 곳으로, KIST의 역사를 함께한 건물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지만, 2층 테라스에서 KIST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귀빈들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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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한지 10년째가 되는 2016년 

KIST 역사관은 새단장을 위한 공사를 시작, 올해 초 재개관하였습니다.


더욱 풍부한 볼거리로 돌아온 역사관 안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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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50년 역사관


1층은 KIST 탄생부터 현재까지 주제별 테마로 꾸며졌습니다. 

영상자료까지 더해져 볼거리도 풍성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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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포토존


70년대 실험실을 재현해놓은 포토존도 있네요! 


바닥 재질부터 과거 KIST 마크가 새겨진 연구복까지.


KIST에서 활동하신 연구원들이 제공한 전화기, 연구노트, 실험기구 등이 놓여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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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기념홀


KIST의 초대 소장이자,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하신 

한국 과학기술의 아버지 ‘최형섭 박사’ 전시실입니다. 


과학한국의 씨앗을 뿌린 최형섭 박사의 연구·행정업적 등을 

동영상과 디지털액자, 각종 전시품 형태로 소개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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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기념홀


전시품 대부분은 최형석 박사님이 직접 기증하신 것들입니다.


“해외출장 여비에 일조됐으면 합니다.”

“한국에 돌아올 인재들을 전 세계에서 모으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입니다.”


KIST 설립자인 故 박정희 전대통령이 최형섭 박사에게 

직접 보낸 친필 서신도 눈에 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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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연구업적관


이곳에서는 다양한 KIST의 연구개발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개발, 중공업화 추진, 수출진흥 등 국가경제발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우수한 연구결과들이 엄선됐습니다.


가발연구부터 최첨단 로봇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분야의 성과들이 전시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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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관-기획전시관

“앗! 공룡이 내 눈앞에!”


이곳은 KIST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무안경 3D디스플레이 ▲공룡이 뛰노는 가상현실공간 체험 ▲위조지폐 감별기 등 체험존도 만들어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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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역사관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연 2천 500여 명.

우리나라 최초 종합연구기관 KIST는 늘 국민에게 열려있습니다.

KIST 방문을 통해 과학기술이 국가발전을 어떻게 주도해왔는지 역사의 숨결을 직접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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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투데이] 국립대전현충원,

1월의 현충인물'최형섭 박사' 선정

 

국립대전현충원(원장 권율정)은 한국 과학기술행정의 기틀을 세운 과학자 최형섭 박사(1920.11.~2004.5. 사진)를 2017년 1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

 

[대전투데이 기사보기]

 

[다른 언론의 보도내용이 궁금하시면 아래 언론사명을 클릭하세요]

충청일보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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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기술 50년, 불이 꺼지지 않는 과학기술

 

올해는 한국에 과학기술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지 50년을 맞는 해다. 조선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에도 과학은 있었다. 하지만 왜 올해를 50년으로 보는걸까. 이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관련이 있다. 한국 과학기술 연구의 요람(搖籃)이자 산업화의 첨병(尖兵) 역할을 해온 KIST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KIST는 미국의 원조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종합 과학기술 연구소이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65년 우리 정부에 1000만달러를 지원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되지 않을 때였고, 쌀 80㎏ 한 가마에 30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막대한 원조금의 사용처를 두고 빈곤사업, 산업체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이 한국의 미래”라며 원조금에 정부 예산 1000만달러를 더 보태서 과학기술 연구소 건립을 지시했다. 현재 KIST의 대강당 이름이 ‘존슨 강당’인 이유도, KIST 정문에 미국 정부의 후원이 명시된 푯말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KIST는 이후 국산 1호 컴퓨터, 자동차와 반도체 원천기술 등을 개발하며 한국의 산업화와 과학 연구를 선도했다. 포항제철소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전자공업 육성 계획을 세워 반도체와 통신장비 개발의 단초를 마련한 것도 KIST였다.

  KIST가 처음 국민들에게 다가선 것은 1974년 삼성전자가 출시한 컬러TV였다. 당시 KIST 손성재 연구원 주도로 만들어졌다. 1982년 KIST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아라미드 섬유는 강철보다 강도가 5~6배 강하고 무게는 5분의 1에 불과했다. 2년 뒤에는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특허를 받았다.

KIST 설립 초창기는 해외 교포 출신으로 고국에 돌아온 ‘유치(誘致) 과학자’들이 이끌었다. 1966년 연구시설과 인력이 거의 없던 열악한 여건에서 KIST가 탄생하자 미국·유럽 등지에서 18명의 교포 과학자가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힘을 보태겠다”는 일념으로 귀국했다.
  초대 소장을 맡았던 고(故) 최형섭 박사는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만들자”면서 과학자들을 독려했다. 정부도 KIST 과학자들에게 서울대 교수의 3배에 이르는 월급을 주며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병권 KIST 원장은 “선배 과학자들의 헌신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 20개가 넘는 대학·연구소가 KIST에서 탄생해 독립했다. 기술경영경제학회는 KIST가 지난 50년간 일궈낸 사회·경제적 부가가치가 60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1966년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회가 출범한 해이기도 하다. 1971년에는 대덕연구단지가 세워졌고, 198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기초연구가 시작됐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서는 수백년, 일본에 비해서도 100년 이상 뒤쳐졌지만 분명히 이땅에서 ‘과학’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전세계인들은 한국의 놀라운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한국은 전쟁 뒤 폐허가 돼버린 땅에서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글로벌 기업들과 나란히 경쟁하며 어떤 분야에서는 세계 1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에서 출발한 글로벌 기업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기술이 뒷받침된 기술 중심의 기업이라는 것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자동차 모두 최첨단 기술을 받아들이고 이를 상용화하려는 시도가 없으면 도태되는 시장이다. 최근 한국 산업의 미래로 주목받고 있는 제약, 바이오 역시 마찬가지이다. 후발주자인 한국은 정부와 기업, 대학이 한몸으로 움직이는 전략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한국 과학기술은 일종의 정체기를 겪고 있다. 각 기업들이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체적인 연구 역량을 키우면서 응용기술 개발의 주도권은 기업으로 넘어갔다. 한때 국가 성장을 이끌었던 정부 출연연구기관은 ‘돈 먹는 하마’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매년 4조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지만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대학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매년 가을만 되면 왜 한국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냐는 지적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이웃 일본과 비교 대상이 돼야만 한다.

  과학계에서는 50년이라는 시간이 과학에서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한국을 찾았던 영국 왕립학회 벤키 라마크리슈난 회장은 “기초과학의 성과는 최소 40~50년 뒤에야 나타난다”고 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된 20세기 초반에도 미국의 과학은 여전히 유럽에 뒤쳐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미국은 경제 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세계 1등 국가가 됐고, 이 과학의 힘이 다시 미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기초과학에 투자해온 일본 역시 1950년대 이후 본격적인 결과물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아직 한국의 과학은 열매를 따먹을 시기조차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농업은 우리의 먹거리를 해결해주고, 사회과학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미래를 열 수 있는 열쇠는 과학에서 나온다. 한국 과학은 산업화를 일궜고,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이 싹이 자라느냐, 아니면 죽어 버리느냐에 대한 책임은 우리 사회 모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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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개혁' 끝장토론 "과학자 역할이 뭡니까"

 

국민의당 신용현, 오세정 의원이 공공대표로 "미래일자리와 교육 포럼"에서 KIST의 신경호 기술정책연구소장님이 "R&D혁신"에 관한 발제를 진행해 주셨습니다. 아래의 링크에서 기사를 확인해 보세요 [Hello DD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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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인터뷰] 최형섭 박사, “부단히 지식 쌓고 국가에 기여해야”


<기사는 故최형섭 박사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다. 일부 대화 내용은 현실에 맞게 첨삭했다.>

"과학은 조국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자기 조국에 영예를 바칠 수 있는 과업에 전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구하는 사람의 성실하고 올바른 사고와 자세, 행동을 주축으로 하는 연구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언제나 첫 새벽이 될 때까지 그의 실험실은 불이 꺼지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 제목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 붙여졌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늘 훌륭한 연구는 돈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겠다는 성실한 마음가짐과 자세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후배 과학자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다.  

최 전 장관은 인터뷰 중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았다. 올해 92세의 고령에도 하늘색 셔츠와 붉은 색 넥타이, 남색 스트라이프의 멋들어진 양복으로 빠짐없이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이겨온 강직함이 묻어나왔다.


최 박사의 회고대로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도전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 결과는 일목요연하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더불어 과학기술계의 다양한 연구 성과로 국가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1960년대 초 한국의 과학기술에서 불과 40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지금도 과학기술인들의 열정과 의지는 세계 최고로의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짧은 기간 내 이룩한 우리나라 과학 기술은 지금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 박사는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정부출연연구소를 세우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소장, 과학기술처 장관 등을 역임하며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오늘을 구축한 장본인이다.

연구의 자율성과 초기 연구환경 조성, 해외 과학자 영입 등을 통해 국내 과학기술 발전이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과학기술처 장관 재임 기간 중에는 기술개발촉진법, 기술용역 육성법 등 관계법령 제정을 통해 과학기술개발의 기반을 튼튼히 다져온 과학계의 '큰 별'이다.

과학기술계의 주요 현안들이 국가적 이슈로 떠오르고, 이에 따른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요즘, 국가 경제, 산업 발달의 산증인이자 오늘날 과학기술의 기틀을 마련한 최형섭 박사를 만나 미래의 핵심, 과학기술계의 발전과 위상확립을 위한 조언을 들어보았다.

최 박사는 "연구자들이 늘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며 "연구자는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스스로 정신무장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일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자들은 끊임없는 창의와 밤잠 안자는 노력을 거듭해야 한다'는 개인의 철학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겨 스스로 새벽녘까지 연구소의 불을 밝히며 진리를 탐구해온 연구자이자, 한국 과학발전의 기틀을 잡은 정책가, 국가과학기술의 선구자이자·개척자인 최형섭 박사. 그의 연구 인생은 오늘날 대한민국 과학계 젊은 종사자들의 거울이 되기에 충분하다.


최 박사는 남다른 카리스마와 열정, 추진력으로 대한민국 과학계를 일궈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되돌아보면 감회가 새로울 터인데. 


많은 일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시작하긴 했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오늘날과 같이 자리 잡았고, 대덕연구단지 건설을 현실화 했다. 특히 연구의 생활화, 과학기술의 국제적 협력기반 마련, 산학협력, 과학교육 의식 개혁을 위해 많이 고민을 해왔다.

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저해 요인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동시에 국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해결책이 바로 과학기술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과학기술이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결실을 맺을 수 있기만을 바라며 과학기술인의 한사람으로서 국가과학기술정책 설정과 개발계획에 참여해왔다. 

지난 수십 년 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나라는 획기적 경제성장을 이룩해왔다. 과학기술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과학기술인의 한사람으로서 1960년대부터 국가 과학기술정책 설정과 개발계획에 참여했으며,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많은 과학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가야할 길도 멀다. 과학기술과 더불어 겪어온 모든 경험과 교훈들이 한국 과학기술의 장래를 책임질 후배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최근 과학기술계에 여러 가지 이슈가 점철하고 있다. 많은 변화 속에서 연구자들이 하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마음가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연구하는 사람이 가는 길은 화려하거나 안이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돈’을 번다는 것과 ‘연구’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중간하게 연구하며 돈도 벌어보자고 하는 것은 일종의 착각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연구는 돈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겠다는 성실한 마음가짐과 자세에서 나온다. 

미국의 과학자 윌리엄 쿨리지(William D. Coolidge)박사는 최초로 X선 장치를 발견한 사람인데 이 발명을 도입한 전기기기 제조업체 GE사가 오늘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당시 GE사는 쿨리지 박사의 공을 생각해 그에게 당좌수표를 백지로 위임하여 마음껏 쓰게 했는데 그는 대학교수들이 받는 최저 봉금만큼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연구자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의 직책에 충실해야 하며, 시간관념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 연구 자체가 생활이 되어야 하며 학문에는 종점이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학문을 하는데 거짓이 없어야 하는데 지식보다 앞서 검소·근면·겸손·성실·의욕과 열의를 가진 인간이 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겸손한 연구자는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한편 신념을 고수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또한 부단히 새로운 지식을 쌓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업그레이드하고, 세계를 앞서나가기 위해 지금 이 시점에서 과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모방의 단계에서 벗어나 창조의 단계에 들어가야 한다. 모방에서 벗어나 개량을 하려면 역시 창의력이 필요하며 창의력을 발전시키려면 기초과학 육성과 기초연구의 강화가 중요하다.

하지만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기술의 선진화를 위해 산·학·연이 협동하는 일괄 연구개발은 필수적이며 지금 한국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구를 하는 것만으로는 곤란하다. 기업에 공헌이 되는 연구를 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연구는 학구적인 것이 아니라 기업이 원하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야 한다. 연구하는 사람도 이에 맞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실은 이와 다르다. 공부한 사람들, 특히 외국에서 학위를 딴 사람들은 역시 학구적인 것을 좋아한다. 초창기 연구소의 경영진들은 이러한 사회의 요구와 연구원의 대응을 현실에 맞게 조화시키는 일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KIST 초대 원장으로 한국 과학계의 초석을 다져왔다. KIST를 설립하게 된 계기, KIST의 설립 중점 방향, 초기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를 말해달라.


KIST의 설립 목적은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 학문을 토대로 우리나라 산업 발전 특히 공업화와 관련한 기술을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KIST 설립 이전에는 우리나라 산업계에 연구개발(R&D)이라는 인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고, 공업화에 따르는 공장건설과 이에 필요한 기술은 모두 해외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KIST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돈도 없고, 직원도 없고 막막했다. 파리가 들끓고 칸막이도 없어 처량한 은행 2층 사무실에서 초라하게 집무를 시작해야 했다. 파리가 들끓는 곳에서 도저히 외국 손님을 맞을 수 없어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사무실로 옮겨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한국의 경제발전 단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때였다. 그래서 설립초기의 핵심 과제는 ‘어떻게 하면 산업계와 연계를 갖도록 할 것인가’였다. KIST 창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기술다운 기술도 없었고, 업계에서도 연구보다는 현장 기술지도자를 더 선호했다.

과기처 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에는, 사람들이 나를 ‘KIST 장관’이라고 부르더라. 장관실 문을 열어놓고 연구소의 연구실장이나 대학교수가 쉽게 출입하며 상의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과기처 관리들의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기처에서 일하는 목적은 과학기술행정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과학기술자가 많이 배출되는 바탕을 만들어주고 이들이 불철주야로 연구에 전념해 성과를 내게 하는 것이다. 이들을 지원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특히 초반에 해외 과학자 유치를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고국 근대화를 위해 나와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미국의 옥토를 버리고 척박한 한국으로 돌아와서 국가 과학발전에 온 몸을 던졌다. 이것이 결국 한국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이들에게는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연구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사회적 인식도 높아지자 연구원들이 보람을 느끼면서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 ‘밤늦게 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고 불리기도 했다.

故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 지원과 초창기 KIST에서 일한 핵심연구원들의 사명감에 불탄 헌신적 노력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KIST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과학기술개발 성공사례를 모델로 삼기 위한 개도국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과거 우리나라도 미국 등 선진국의 도움을 받았다. 타이, 파키스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 정치적·사회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동남아시아 각국은 과학기술 개발을 추진을 위해 한국을 모델로 삼고자했다. 한국의 성공사례가 그들에게도 적합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개발도상국에 대한 과학기술 자문을 시작한 것은 1981년 3월 타이에 가서 과학기술 개발계획안을 마련해준 것을 시작으로 1991년 7월까지 10년 동안 해외에 나간 것이 무려 65회가 된다. 평균해보면 1년에 6회 이상 나간 셈이다. 

과학기술 정책 및 전략에 대한 국제회의를 주재하기도 하고, 초청강연, 기조연설, 기술자문, 과학기술 정책수립 및 계획작성의 지도 등을 맡아서 해왔다. 

나는 한국에서 내가 했던 스파르타식으로 일을 추진해나갔다. 우리나라 사례를 중심으로 과학기술 개발정책을 어떻게 수립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겼는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공업화를 위한 기술개발 대책, 과학기술 인력양성방안, 과학기술을 뿌리내리기 위한 풍토조성방안, 과학기술진흥법 등에 조언을 해줬다. 

이후 중국·중동·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과 기술협력도 이어졌다. 한국의 개발모델은 당시 큰 이슈가 됐었다. 만일 일이 잘 안되면 우리나라 체면에도 관계가 되는 일이라서 제대로 된 것을 남기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매일 여러 차례 이어지는 강연들로 때론 고단하기도 했지만, 나이 많은 사람의 경험을 애써 들으려고 노력하는 그네들의 열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KIST와 과학기술계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조언해준다면.


KIST는 그간 과학기술진흥 장기전망, 장기에너지 수급계획, 전자공업 육성방안, 중공업 육성방안, 기계공업 근대화방안, 포항종합제철 건설계획 등 정부의 각종 장·단기 과학기술 및 경제발전을 위한 정책수립과 계획 작성에 참여해왔다.
 
또한 전문적 자문역할을 담당, 중요한 국가정책 수립 및 국가연구과제 추진에 두뇌적 역할을 해왔다. 당시 KIST에서 나온 연구 결과 대부분은 국가 주요 산업정책으로 채택이 될 만큼 국가적으로도 KIST의 연구결과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정부도 중요정책 수립과정에 있어 과학기술적 지식과 접근방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KIST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업이 필요로 하는 당면 연구과제 해결은 전문 연구소에 맡기고 미래 지향적 연구를 해야 한다. 다른 연구소에서 할 수 없는 장기적 국책과제를 떠맡아야 한다는 뜻이다. 에너지, 환경복지, 신소재 개발 등과 같은 기술개발과 장기연구 또한 일반 기업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일궈온 과학기술 수준을 적절히 소화 흡수하고 이를 현명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국가의 잠재력이자,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과학이라는 데는 어느 이제 누구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연구자들이 앞장서서 끊임없이 땀 흘리며 미래를 개척해나가야 한다.


생활 속의 과학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관심이 요구되는가. 과학정신이 국민의 생활방식, 의식구조에 자연스럽게 흡수돼야 할 것 같은데. 


매년 4월은 과학의 달이다. 과학기술 관계 유관기관과 단체들의 협조를 얻어 범국민적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전 국민의 과학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생활의 과학화 습성을 익히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학교교육과 과학교육, 사회환경 교육 등을 통해 어린이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합리화하고 과학화하는데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면 과학을 ‘아는 교육’에서 ‘하는 교육’으로 바꿔야 하며 현상을 분석하고 이를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자격을 따는 교육이 아니라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노력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지속적 공감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국가의 미래는 과학기술에 달려있다. 대한민국 과학 역사의 시작점을 열었고 현장을 지켜봐왔다. 앞으로 연구자들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나, 미래를 이끌어나갈 주인공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를 한다면. 

국가를 이끄는 핵심도, 연구 생산성 향상의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요소도 곧 사람이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과학기술인들이 으뜸이라는 이야기다. 국가는 이들에게 자율성을 주고 연구에 지장이 없도록 뒷받침해야한다. ‘통제’가 아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단 후배과학자들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꼭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이야기지만, 후배 과학자들이 꼭 기억해줬으면 한다.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나 역시 오랜 시간 국가발전과 연구에 매달려왔다. 이와 같은 스스로의 다짐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각오들은 내 삶의 원동력이요 지침서이기도 하다. 늘 마음속에 새기며 고민했던 당부의 이야기를 후배 연구자들도 꼭 가슴에 새기고 기억해 주길 바란다. 


 故 최형섭 박사 그는 누구 ?

국민훈장 무궁화장, 제1회 한국공학기술상 대상,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일본 닛케이 아시아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3년에는 국립서울과학관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과학 위인으로 등록되었다. 2004년 5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동양 최대의 싱크탱크로 알려져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실질적 창설자다. 66년 발족한 KIST의 초대 소장으로 재직하며 그는 과학자로서 뿐 아니라 과학기술 분야 행정가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 성공적 결과를 이끌어왔다. KIST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국내 산업계 연구개발 붐을 조성했고, 학계와 연구소와의 협조체제를 구축하는데 역량을 보이기도 했다.

국내 과학기술인의 구심점. 그는 KIST에서 미래 한국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했다.



Posted by KIST 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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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n 2011.04.27 1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적인 사진들도 많군요. 좋은 기사 잘 봤습니다.

  2. 조용채 2011.05.28 0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ist의 역사와 미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