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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KIST 머릿속에서 포항제철·현대조선 탄생"

 



[인터뷰]KIST 1세대 연구원 '윤여경 전 KIST 동문회장’

1세대 중 유일 경제전문가 '연구성과 타당성' 분석  

포항제철·현대조선, KIST 노하우와 아이디어에서 탄생 

산업계 요구 R&D 해야 했던 그때 "미래 연구하는 KIST 모습에 뭉클“



제대로 된 공항이 없어 일본을 경유해 해외로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절. 미국인 추천 없이 유학이 어려웠던 그 때 많은 젊은이들이 어렵사리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윤여경 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동문회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의식주가 궁했던 시절 윤 회장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대안을 고민, '개발도상국 경제발전 이론을 연구해 전문가가 돼야겠다'는 꿈이 생겼다. 미국행 비행기에 어렵사리 몸을 실은 이유다.


미국에서 유학하며 공부 하나는 자신 있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곳을 골라 대학도 선택했다. 유타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미국 포드대학에서 경제 분야 MBA 전공하며 미국식 경영을 배우기 위해 '노던 일리노이 가스컴퍼니'에 취직했다. 일하는 게 즐거워 업무에 몰입했더니 회사 70년 역사에서 이례 없는 승진까지 하게 됐다.


높은 봉급에 거주할 집까지마련해준다 하니 미국에서 살지 말란 법이 없었다. 미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들른 한국에서 그는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KIST 초대 소장)과 KIST를 만났다. KIST는 운명처럼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았다.


"KIST 연봉이 당시로선 적은게 아니었지만 미국 기업과 비교하면 3분의 1정도였다. 높은 연봉에 미래가 보장된 미국기업에 입사하느냐, 과학기술 불모지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느냐 정말 고민이 많았지만 한국행을 택했다.이왕 직장을 옮길 것이라면, 한국에서 일을 할 거라면 한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그가 KIST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KIST의 수장인 최형섭 소장의 영향도 컸다. 그는최 소장의 철학과 소신에 반했다. 첫 만남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두 사람 사이에 통하는 게 있었다. '이 분이라면 내가 평생 모셔야 된다' 지금도 그 결심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단다.


KIST 초창기 멤버인 그는 1세대 연구원 중 유일한 경제 분야 출신으로 경제분석실에서 개발된 기술을 제대로 산업화할 수 있는지 타당성을 검토해 실제 상용화 가능한지를 분석했다. 최형섭 소장이 10여명의 박사 대신 경제분야 출신을 투입했다고 하니 연구소에서 그에게 거는기대도 컸음이 짐작된다.


13여 년간 KIST에서 정부출연연구기관 설립과 연구성과의 타당성 분석, 현 벤처캐피탈의효시인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TAC)창업을 이끈 윤 전 회장은 "하고 싶은 연구보다 우리나라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경제성장에 초점이 맞춰진 연구가 시급했던 그때 사명감 하나로 버틴 연구자들이 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그간의 세월을 평가했다. 


선진국도 실패한 '韓 철강사업'…KIST 연구자 아이디어로 실현시키다


과학기술 불모지에 발을 디딘 18명의 과학자, 그리고 윤 전 회장은 1968년부터 1973년까지 KIST의 중심축으로 활약했다. KIST의 기술도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역할에서 그가 관여한 대형 프로젝트만 10건이 넘는다. 그 과정에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와 현대조선이 탄생했다. 모두 KIST 연구원들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이었다.   


포항제철의 시작은 1969년 6월경 최 소장이 윤 회장을 소장실로 부르면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 오랜 숙원사업으로 추진을 예정했던 종합제철사업을 김재관 박사와 함께 맡는 것이 KIST 그리고 두 사람의 미션이었다. 김재관 박사는 기술적 타당성 분야책임을, 윤 회장이 당시 실장으로 있던 경제분석실은 경제적 타당성 분야 책임을 맡았다.



윤 회장이 기억하는 김재관 박사는 꼼꼼한 성격의 엔지니어로 KIST 유일의 철강전문가였다. 독일 제철회사에서 근무하다 KIST와 인연을 맺은 그는 독일 연구시절부터 '우리나라에도 철강산업을 해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으면서도 꾸준히종합제철 건설과 운영에 대한 자료수집을 해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엔지니어들을 격려하기 위해 독일에 방문했을 당시 김재관 박사가 손수 정리한 자료들을 박 대통령에게 직접 건네며 우리나라에 종합제철이 필요한 이유를 피력한 사례는 이미 유명하다. 박 대통령도 그에 공감했는지 긴 시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종합체절사업은 미국이 주축이 되어 서독, 이태리, 영국 회사들의 지원을 받아 시도됐으나 우리정부와 대한국제경제협의회, 세계은행 등에서 비합리적인 사업이라는 평가를 받아 추진이 불가피했다.


윤 전 회장은 "기존에 엎어진 계획서를 뜯어보니 문제점이 많았다"며 "초기 투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무리하게 규모를 줄인 탓에 조강 60만 톤 설비 도입이라는 경제 규모에 못 미치는 생산성 낮은 내용들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윤 회장은 과거 경험을 통해 프로젝트 타당성검토에서 수요예측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한국의 총 연간 철강재 수요를 분석하고 제품 생산계획도 선진국의 예를 참고로 생산비율을 정했다.


김재관 박사는 제철회사에서 근무한 현장경험에서 수집하고 분석한 자료들을 토대로 조강 100만 톤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종합제철소의 최소 단위라는 것을 밝히고 설비계획을 동시에 착수키로 했다. 


그러나 제철소는 기업으로서 자립이 가능해야했기에 적절한 이익이 중요했다. 이에 김재관 박사는 제조 원단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기계선정을 했고 시설투자비도 줄이기 위해 생산 라인 기계도 여러 번 바꾸고 제조원단위도 바꾸며 밤낮 가리지 않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추정재무제표를 기준으로 소요자금 외자 1억2037만 달러와 633억 원에 이르는 조강 103만 톤 종합제철 계획서가 완성됐다.


외자 1억2천37만 달러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내용은 청와대에 보고가 됐고 일본 측에서 자금을 줄지 말지 보고서를 보고 판단키로해 동경에서 열리는 양국 경제장관회의에서 양국 관계자들이 만나기로 했다.


일본 측은 3대 제철회사인 ▲후지제철 ▲야하다 제철 ▲일본 강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TF팀이 배석했다. 우리나라측은 윤 회장과 김재관 박사, 정문도 차관보, 노인환 공공차관과장, 김철 철강계정 등이 선발됐다. 김재관 박사는 기술적 타당성 검토설명을, 윤 회장은 경제적 타당성 검토설명을 담당했다.


"발표장에 들어가니 10명이 넘는 일본 사람들이 일어로 번역된 '포항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을탐독한 듯 여기저기 빨간 표시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것이 나의 의무. 어떻게 해야 이들의 기에 눌리지 않을까 고민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며 영어에 자신 있었던 그는 영어로 발표해도 되는지 정중히 묻고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중 가장 뜨겁게 이야기가 된 부분은 수요예측. 수요예측이 타당하면 경제적 타당성이 당연히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오고갔고 두 사람은 대일청구권자금사용에 합의를 이끌어냈다. 선진국의 일류 회사들이 실패한 사업계획서 타당성을 KIST가 성공시킨 사례다.




KIST 조선소 가능하다 주장에 정주영 회장 "해보겠다" 의기투합  


포항종합제철사업의 성공적인 출발의 공을 인정받은 KIST는 국가의 모든 산업육성정책수립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윤 전 회장은 경제분석실장 자격으로 반드시 참석하게 돼있었다.


그러면서 담당한 과제가 상공부요청에 의한 '기계공업근대화의 기본방향작성(4대 핵공장)'. KIST 관련 부서의 실장들로 구성된 TF는 제철사업다음으로 4대 기계공업의 소재인 특수강공장과 중합중기공장, 주물공장을 선정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업을 포함시킬까 고민하고 있을 때 김훈철 박사가 20만 톤 생산규모의 조선소건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계공업 근대화에서 대규모 조선소 건립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1만 톤 정도의 화물선 수리시설밖에 없었다.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KIST의 유일한 조선공학전문가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안 될 것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훈철 박사는 배를 짓기 위한 3가지 조건(▲선박 설계 ▲선박용접기술 ▲선박용 엔진)을 우리나라가 충족할 수 있음을 피력했다. 


20만 톤 선박설계 능력이 없지만 도면은 선진국에 파는 것이 있으니 사오면 되고, 일본·미국·독일회사가 '선박용접기술'을 노출하지 않지만 스웨덴 조선소와 가능성을 타진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며, 선박용 엔진은 구입해서 쓰는 것이 원칙이니 3가지 요소가 모두 충족된 것이 아니냐는 것. 이렇게 4대 핵공장 계획에 조선소건립을 포함한 4개가 선정 완료됐다. 


이 내용은 대통령과 각 경제관련 부처장관, 업계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표됐지만 예상대로 조선소건립에서 참석자들의 반발이 거셌다. 우리나라 사정상 가능하겠냐는 반응. 그 때 가능성이 있다며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선 것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다. 


그는 "정 회장이 아파트 건설과 선박 제조가 별반 다를 것 없다며 즉흥적으로 해보겠다고 나섰다"라며 "'현대조선'의 출발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윤 전 회장은 KIST에서 구로공단과 부평공단 등 수출 공단의 기업들이 제대로 수출할 수 있도록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윤 회장과 KIST연구원들은 아침마다 단체 버스를 타고 구로동 회사에 들러 기업을 진단하기 시작했다. 개선 가능성이 있는 회사를 타진한 결과 대한광학(일본 카메라 기술을 도입해 쌍안경 등 제작업체)과 세정실업(기타조립 제작업체)에서 생산관리와 원자재 조달을 적절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윤 회장이 기억하는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도 아는 것도 없어서 선진국에 눈뜬장님처럼 당하기만 했다. 부품 값을 부풀려도 몰랐고 신제품인줄 알고 사왔더니 구형모델인 적도 많았다. 대한광학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동안 내역 등을 자세히 보니 생산원가의 70%가 원자재 값이었다. 일본에서 부품가격을 조작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관련 업무를 하고 은퇴한 기술자를 만날 기회가 있어 논의했더니 역시 부품가격이 부풀려져있었다. 직접 일본에 가서 1년간 수입하는 양이 상당하니 가격을 조율하자 했다. 그렇게 원자재 값을 40%네고 했고 대한광학은 이후 흑자가 나기 시작했다."


세정실업에서는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한 손으로 하는 것 보다 두 손으로 하면 더 빨리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실현했다"고 말했다.


윤 전 회장, KIST 연구성과 기업화전담기관 K-TAC 수장되다


1974년 즈음 KIST에서 개발된 연구성과를 기업화하는 기관 K-TAC(한국기술진흥)이 출범했다. 연구소의 성과를 기업화하는 기구는 일본과 독일 등에서 경제성장을 일으키며 긍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이런 조직을 운영할 것인지와 금방 망할 것이라는 등 반대에 부딪혀 부결될 위기에 처했다. 


최형섭 소장은 KIST 초대소장을 역임하면서부터 이 같은 기관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KIST의 임석춘 이사장도 필요성에 공감, 적극 지지해주었다. 애초 2억 원을 출자해 기관을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이사들의 반대에 2000만원의 예산으로 1974년 9월 9월 전담기구가 출범했다.


윤 전 회장은 KIST에 근무하면서 K-TAC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겸직 발령받아 이끌었다. 안영옥 KIST 박사팀이 개발한 프레온 생산기술을 한국산업은행에 기술 이전해 상용화하고, 채영복 박사가 개발한 농약 살충제의 중간원료를 한국농약과 논의해 합작 투자, 급성장에 성공했다.


이 외에 천병두 박사의 청동분말야금기술은 상용화를 통해 (주)창성의 모체가, 장성도 박사의 내화갑 제조기술로는 남해요업이, 한문희 박사의 3-formyl Ribamycin 기술은 유한양행과 합작으로 유한화학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KIST 설립 10년 만에 하고 싶은 연구 시작…후배들 모습에 뭉클"


"KIST는 국가와 산업계가 요구하는 기술개발을 지원하다 설립 10년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기술자립을 준비했다. 지금 후배들은 미래지향적인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KIST가 이렇게 성장한 모습을 보면  놀랍고 자랑스럽다."


KIST의 성공적인 출범 후 대기업들의 기술개발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KIST의 합리적 기술도입지원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이 수입제품이상으로 질이 좋고 싸다는 인식이 산업계에 널리 퍼지면서 자체적으로 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민간연구소 초대 소장으로는 경험이 풍부한 KIST 연구원이 스카우트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달라진 점은 KIST에서 파생된 연구원이다. 화학, 선박, 전자통신, 식품, 표준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기관이 KIST에서 분리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 현재 대전에 위치해 있는 ETRI, 한국전기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등이 KIST를 모태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대기업은 대기업 나름의 연구개발을, 파생연구원에서는 각자 미션에 맞는 연구를 맡아주니 KIST는 앞으로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했다. 늘 해오고 싶었던 '미래지향적인 연구개발'의 시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연구비였다. 당장 돈이 안 되는 미래지향적인 연구비를 산업계가 줄 리 없었다. 정부출연금형태로만 운영을 해야 하지만 너무 적었다. 1978년 정부출연연구비는 7억 수준이었으나 KIST 기획관리실에서는 최소 35억 원 돼야한다고 결론 내렸다.


7억에서 35억 원. 예산 500% 증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과학기술처 장관이 된 최형섭 박사를 찾아가 의논했다. 35억 원 출연금을 반영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르겠지만 지금이야말로 KIST가 미래지향적인 과제중심 연구를 할 때라는데 최 장관도 공감했다"면서 "최선을 다해 밀어붙여볼 때라고 격려해줬다"고 말했다. 



윤 회장은 다음으로 경제기획원 예산국 과학기술예산과의 강봉균 과장(이후 정보통신부장관, 국회의원 역임)을 찾아가 의논했다. 강 과장은 왜 이만한 예산이 필요한지 어떻게 사용할지를 설득시킬지 자기를 설득해주면 총대를 메겠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윤 회장은 KIST로 돌아가 1달간의 준비기간을 가지며 KIST 각 연구실장과 모임을 가졌다. 그는 "한국에 필요한 기술이 무엇이며 지금 당장 착수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기획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면서 "회의에 참석한 실장들은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하고 싶은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말했다.


2주일 후 KIST는 30개의 연구개발과제와 각 과제 당 5~8개의 세부과제를 도출했다. (▲규소화학공정의 개발 ▲태양열이용 연구 ▲폐자원 이용연구 ▲수자원오염관리 및 폐수처리공정개발 ▲의료용 소재 및 생물 전자장치 개발 등) 윤 회장과 KIST는 이 과제를 정리해 '기술자립에의 도전, KIST 장기연구계획'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윤 회장은 총 5개년 예산 600억 원으로 작성하고 올해 40억 원 상당의 연구과제만 선별해 연구를 착수하기로 하고 강봉균 과장과 논의해 예산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KIST는 이 과제를 국책적 연구과제라고 불렀다. 우리주변에서 흔히 쓰는 국책연구과제라는 용어의 시초가 됐다.





불철주야 연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 "신바람나는 연구현장돼야"


그로부터 40여년. 세월이 빠르게 흘렀다. 그가 처음 KIST에 왔을 때 말단 보안사원이 지난해 최고참을 역임하고 퇴직한 것만 봐도 많은 게 변했다. 


그러나 제일 큰 변화는 선진국 기술을 도입해 소화개량했던 KIST가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최형섭 소장님께서 KIST가 국가와 산업계가 요구하는 기술개발을 하는 것은 과학자로는 매우 큰 희생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가 주어진 업무를 충실하게 하면 후배들은 자기가 원하는 기술을 개발해 국가경제발전에 이바지할 것이고 거기서 우리가 보람을 찾을 것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최 소장님이 꿈꾸던 KIST 모습으로 변해온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하다."


그러나 최근 연구현장의 상황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연구과제수주방식이나 임금피크제, 행정부담 등으로 연구에 집중을 할 수 없는 환경이 된 것 같아 안타깝다. 그는 후배들에게 "KIST가 신나는 직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그는 "결과가 궁금해 집이 근처에 있어도 우린 밤을 새며 연구했다. 작업대는 곧 내 침대였다"며 "사명감으로 일했고 연구소 자체가 신바람이 났었다. 연구하는 사람들이 신이 나야 좋은 성과들이 나온다. KIST가 신바람나는 직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