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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한우물을 열심히 파니 길이 더 많아지더라"

“얼마 전에 후배 부친상에 조문을 갔어요. 거기서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회원 여럿을 만났는데 반가운 마음에 장례식장 한 편에서 같이 얘기를 나눴죠. 다들 크고 작은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자연스럽게 리더십에 대한 얘기도 나왔어요. 제가 모임에서 3대 회장을 했었는데, 그 때 제가 일하는 스타일을 봤던 후임 회장 중의 하나가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유 박사님은 직원들을 부드럽게 죽여줄 거예요.’ 같이 있던 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수긍하는 걸 보면서 저도 참 재밌어 했죠.”

유영숙 환경부 장관은 흔히 유리천장을 뚫고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간혹 미디어를 통해 나타난 성공한 그녀들의 인상은 강인했다. 진한 화장을 하고 정형화된 미소를 띠고 있거나 전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등 극단적인 모습이었고, 대체로 남자보다 큰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인상으로 조근 조근 말하는 유 장관이 그녀들 보다 현실적이고 평범한 여성상이건만 오히려 신선했다.

하지만 인터뷰에 배석한 환경부 유승광 정책홍보팀 과장이 ‘부드럽게 죽여준다’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는 것을 보니 역시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닌 듯하다. 유 장관은 부임 후 면담과 내부평판평가를 통해 공공부문에선 이례적으로 파격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관용차는 다른 장관들이 주로 타고 다니는 대형 세단 대신에 배기량이 절반에 해당하는 2000cc급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선택했다. 필요한 일이라는 판단이 들면 주변의 눈치 보지 않고 단호하게 선택하고, 쉴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중요한 문서들은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한다는 후문이다.

분 단위로 짜여진 일정 중에서 유 장관은 ‘KIST 관련된 일’이라는 이야기에 선뜻 시간을 냈다. 그는 1990년대 초 열 명도 채 안 된 KIST 여성 박사 중 하나로 들어와 KIST 최초 여성 센터장과 본부장, 부원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록을 남겼고, KIST 책임연구원 최초로 환경부 장관에 취임했다. 많은 부분에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에게 연구원에서의 경험과 추억, 바람직한 KIST의 발전상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계속 학업을 이어가라고 장려하던 남편, 내가 혼자 미국 유학갈 것은 예상 못했다”


- 이과 전공하는 여성들이 많지 않았던 시기에 과학을 전공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과학은 한 가지 의문을 해결하면 새로운 궁금증이 시작되는 복잡한 세계였고, 이것이 큰 매력이었다. 이과 전공 여성들이 과학 분야에 많지 않았지만, 자연의 신비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선 성별이 무의미했고, 상대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도 타 분야에 비해 심하지 않았다.”

- 그래도 대학원까지 진학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여자대학교를 나왔는데, 화학과 동기들 33명 중에 대학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단 두 명뿐이었다.”

- 좀더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내린건가.

“연구를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것이 컸지만, 학창시절 만나 교제하던 동갑내기 남편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여성도 여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주부에게도 의미 있는 세계가 있고 가정의 인프라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직업이나 학업의 성취를 이루도록 옆에서 조언을 많이 해줬다.

- 혼자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유학은 내 의지였다. 박사과정까지 밟고 전문성을 갖고 싶었는데 1979년 당시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은 지금과 같이 선진적이지 못했다. 특히 연구를 하기에 여건이 안 좋았다. 그래서 유학을 결심했는데 주변에서 걱정도 많았다. 학업을 장려하던 남편도 미국 유학까진 예상을 못했던 것 같다. 양쪽 집안 어른들이 결혼은 하고 유학가라고 하셔서 군복무 중이던 남편과 5월에 결혼해 8월에 혼자 미국으로 갔다. 이후에는 내가 미국 유학을 떠난 것에 남편이 오히려 영향을 받아서 그 사람도 유학을 하는 계기가 됐다.”

-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다.

“박사와 박사후과정을 미국에서 하면서 학문적으로 많이 발전한 것도 있지만, 정신적으로도 많이 컸다. 미국에서 혼자서 지낸 시간이 4년이었다.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겠는가. 통장잔고가 50달러 남아있을 때의 그 불안감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 늘 장학금 받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공부했다. 그런 시간들을 이겨내면서 스스로 많이 깊어진 것 같다.”

  
“한눈 한 번 안 판 KIST에서의 20년 …연구결과 인정받은 것이 가장 큰 보람”


- KIST에 들어온 계기가 있나.
 

“오레곤 주립대학(Oregon State University)과 스탠포드대학(Stanford University) 등 미국에서 10년을 보낸 후 귀국하며 연구를 계속 하고 싶었고, 국가연구소가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 KIST의 첫인상은.

“1989년에 도핑콘트롤센터에 들어왔는데 그때가 88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라 시설이 굉장히 좋았다. 미국 못지않게 첨단장비를 갖추고 인력도 많았다. 물론 이후에는 올림픽 끝나고 나서 지원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에 연구비를 받아서 그 일부로 기기를 마련해야 했다.”

- 1990년대초 KIST의 연구환경은 어땠나. 

“굉장히 빡빡한 생활이었다. 2스트라이크아웃, DDR 등 연구원에 대한 평가가 매우 까다로웠다. 때문에 젊은 연구원들이 많이 떠나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사느라 다른 길을 생각해볼 여력이 없어서였는지 희한하게 한 번도 한눈을 안 팔았다.

- 가장 보람됐던 것은 무엇인가.

“연구자니까 역시 연구결과를 인정받을 때가 가장 보람된다. PBS(Project Based System) 제도 아래서 연구했기 때문에 매일 연구제안서를 써서 연구비 수주를 해야 했는데 어느 해인가 동시에 3개의 프로그램이 선정된 적이 있다. 경쟁력을 인정 받은 것 같아 기뻤다. 또 생화학 분야 국제학술지인 ‘일렉트로퍼리시스(Electrophoresis)’의 시스템 생물학 분야 편집위원이 된 것도 다른데 눈 돌리지 않고 한 우물 판 연구업적을 인정받은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아모레퍼시픽 여성과학자상 대상 등을 수상한 것도 영광의 순간이다.

연구 외적인 부분에서는 여성리더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 큰 보람이다. 처음엔 그냥 연구만 하고 싶어서 사양했지만 여자후배들을 위해 생각을 바꿨다. 늘 소수인 여성연구원들도 리더가 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다른 것보다 ‘조직원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먼저 ‘솔선수범’하기 위해 노력했다.”

- 혹시 그래도 연구자로서 후회되는 부분이 있다면.

“아이를 하나만 낳은 것이 조금 아쉽다. 연구자로서 출산과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국가의 미래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지금의 저출산 고령화시대를 예상하지 못해서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도 있었다. 그만큼 정부정책이 참 중요하다. 그래서 KIST 본부장할 때부터 조직 내에서 나름의 출산장려정책을 썼다. 각 센터의 사무원에게 요청해 본인, 혹은 부인이 출산하는 연구원을 파악해 사비를 털어 선물을 했다. 지금 환경부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고 앞으로 어느 자리에든 할 생각이다. KIST든 환경부든 이런 인재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국가 미래에 좋은 일이다.”

몇 해 전 다른 인터뷰에는 유 장관이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 실험과 육아를 병행하다가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이야기가 있다. 너무 힘들어서 악몽도 많이 꿨다고 한다. 자신의 고생을 남들도 똑같지 겪지 않길 바랐던 것인지 유 장관은 KIST에서 ‘가정의 가치’를 중시한 리더로 알려져 있다. 아이나 집안에 중요한 일을 두고 말 못하는 연구원들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가정을 돌보도록 배려해줬다. 대부분 집안일을 해결하고 돌아온 후 오히려 연구를 더 신나게 잘했다고 한다.


 
 “나의 자랑 KIST, 앞으로도 출연연 맏형 역할 해낼 것으로 확신”
 
 

- 밖에서 보는 KIST는 어떠한가. 

“우리나라가 지금의 산업화, 경제성장을 이룬 바탕에는 KIST가 공헌한 것이 굉장히 많다. 21년을 그런 훌륭한 조직의 일원으로 있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정말 자랑스럽다. KIST가 앞으로도 국가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을 가진 연구를 진행하길 바라고, 그 과정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종합연구소로서의 장점을 살려 통섭과 융합연구에 앞장서길 바란다. 또 KIST는 출연연의 맏형으로서 다른 연구원에 미치는 파급력이 상당하다. 선행 연구기관으로서, 과감히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전례가 없기에 실패할 확률도 높지만, 실수마저도 다음 단계로 나가가는 중요한 초석이 된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 환경부 장관에 취임한지 6개월 가까이 됐다. KIST에서 리더로서 역량을 발휘해 왔지만, 지금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환경보전과 녹색성장의 총괄부처로서 환경 비전을 실현하는 최일선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생화학·자연환경 분야 전문가가 환경정책을 아우르는 기관의 수장이라는 중책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취임자리에 섰던 기억이 새롭다. 자율성과 창의성이 KIST에 있을 때의 핵심가치였다면, 환경부 수장으로서는 그 외에도 국민과의 소통, 정책 관련 부처·기관과의 협력 등의 가치가 추가로 요구된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10월 국정감사와 11월 예산 심의 등 국회관련 일정을 소화하면서, 올 한해 환경부가 추진해온 정책들을 국민의 시각으로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 KIST에서의 활동이나 과학기술인으로서의 경험이 어떠한 도움이 되는가.

“KIST에서 화학과 생물학을 연결하는 연구 분야에 있으며 ‘융합’을 늘 화두로 삼아왔다. 연구 분야 뿐 아니라 연구원 개인과 조직간 조화를 이루는데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연구와 조직관리에서의 경험이 환경부에서 큰 도움이 된다. 환경 분야는 매우 넓고 다양한 학문의 집합이다. 생화학을 전공한 과학자로서, 그간의 경험이 취임 직후 불거진 고엽제 매립의혹 등 환경 현안을 해결하고, 환경보건 등 환경분야 핵심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또 전문성과 정책 간 연계성을 높이고 정부와 국민의 소통을 강화하고자 노력 중이다.”

- 최근엔 모든 부서가 R&D를 한다. 환경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R&D를 소개한다면.

대표적인 R&D 사업으로는 2020년까지 핵심 환경기술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하기 위한 ‘Eco-Innovation 기술개발사업’이 있다. 2020년까지 1조 5천억원의 국고(민간 투자 포함시 2조1천억원)를 상수도 관망, 수처리, 친환경자동차, 유용자원순환 등 4개 분야 R&D 사업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올해 5월 4개 사업단이 출범함으로서,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했다. 이외에도, 국민건강 보호, 기후변화 대응 및 폐자원 에너지화 등 정책 수요가 예상되는 분야에 대한 신규 R&D 사업을 기획 중이다.”

- 향후 계획은.

“현재는 머릿속에 환경 생각뿐이다. 특히 구제역 매몰지로 인한 환경 영향, 미군기지 고엽제 등 환경오염물질 매립 의혹 해소 등 국민들이 우려하고 있는 현안에 대한 완전한 해결을 우선적으로 생각 중이다. 아토피·천식 등 환경성질환 해결도 숙제다. 생활 속 환경 위협을 해소하는데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입지전적의 길을 걸어온 유 장관이건만, 그는 자신이 한 일은 “한 우물을 판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은 내가 환경부 장관이 될 거라고 스스로 상상해 본 적이 없고 주변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연구를 좋아하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다보니 여러 가지 기회가 주어졌다”고 덧붙였다.

“물은 차야 넘치는 것이지, 처음부터 넘치려고 차는 것이 아닙니다. 행정·공무 분야는 KIST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해 온 길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고수는 서로 통한다고 합니다. 학제 간 연구, 통섭 등 다른 길과의 소통을 위한 전제는 자신의 길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전문성의 확보입니다. 그 이후에 다른 학문, 다른 영역과의 접목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역량과 다른 분야를 이해하려는 열린 사고 등을 갖춘다면 어느새 내가 걸어온 외길이 아주 넓은 대로가 되었음을 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