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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KIST Opinion

[디지털타임스] '안전한 실험실'이 혁신 첫걸음(장준연 차세대반도체연구소장)

 

'안전한 실험실'이 혁신 첫걸음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건강한 생활의 영위'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안전'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에는 '안전'이라는 부분은 소홀히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경제성장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안전의식이 그 사회와 국가를 판단하는 새로운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외국생활을 해보거나 해외여행을 가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아끼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주차료와 배달료다. 필자가 생각해 보건데 이러한 비용은 상품의 가치를 향상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지불되는 비용이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유사하게 그동안 안전을 위한 비용도 허공으로 없어지는 비용이란 인식이 많았다. 만약에 일어날 사고를 대비해 만들어진 보험보다도 실질적인 안전을 위한 투자에 인색한 것은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조금은 이상한 일로 여겨질 법하다. 논리적으로도 보험은 사고의 발생 가능성을 낮추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 안전에 대한 투자가 보다 적극적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산업 재해로 인한 직·간접적인 경제적 손실 추정액도 연간 20조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안전을 위한 투자가 결국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실험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몇 가지 의견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안전과 관련된 예산을 적정수준으로 확보해야 한다. 연구현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최근 들어 실험실 안전비용이 연구비에서 필수적으로 배정되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연구과제나 기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연구비 중 약 0.5%가 연구실 안전관리비로 배정되고 있다. 실험실 안전이 지켜지지 않아 발생하는 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최악의 경우엔 인명피해가 발생함은 물론이고 연구지연으로 인한 기술적, 경제적 손실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안전이라는 가치가 가지는 무게를 생각해 볼 때 0.5%가 과연 적절하고 충분하게 책정된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안전에 관련된 비용도 기관의 승인을 받으면 적절한 규모를 더 사용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실험실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시스템과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안전에 대한 홍보나 교육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구현장에서는 여전히 안전사고 소식이 들려온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실험실 안전사고는 개인의 안전의식 부족의 탓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물론 개인의 귀책사유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전사고를 개인의 과실로만 돌리는 것은 과도하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24시간 안전사고를 염두하고 지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실험실 안전관리를 위한 시스템과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우선돼야 한다. 개인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길을 건넌다고 해도 신호시스템이 잘 갖춰진 도로를 건너는 것만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안전시설이나 안전시스템은 일종의 사회 간접자본이다. 따라서 이러한 간접자본의 유지를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예를 들면 대피로와 같은 안전공간의 확보, 전기안전 점검, 그리고 이런 안전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인력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실험실 안전과 관련된 패러다임 간 충돌을 완화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 실험실 안전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효율이라는 가치와 안전이라는 가치가 서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지킬 것 다 지키면서 언제 실험을 하고 언제 성과를 낼 수 있느냐는 분위기를 주변에서 느낄 수 있고 현실을 무시한 규정을 만들어서 연구자들을 귀찮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단 1%도 되지 않는 사고 위험성 때문에 일이 중단되고 늦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1%의 사고 위험성이 가지고 올 엄청난 후폭풍을 생각해야 한다. 안전매뉴얼과 규칙들은 수많은 전문가들과 선배 과학기술자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그 확률이 1%가 아니라 0.01%라고 하더라도 꼭 지켜야 하는 이유다. 효율성이라는 가치와 대립이라는 패러다임을 버리고 안전이라는 가치를 주어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학은 과거로부터 꾸준히 미신과 오류로부터 인류를 계몽하며 현재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만큼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이나 행동이 일반 대중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위험시설이 들어선다거나 하면 과학자들이 해당지역으로 이주해 안전성을 몸소 입증함으로써 지역 주민들을 안심시키기도 하고 방송에서 어떤 의학 전문가가 즐겨먹는다는 음식을 소개하면 그 음식이 불티나게 팔린다. 따라서 과학기술자들의 일터인 실험실의 안전이 잘 지켜질 때 국민들은 과학기술자들이 지키는 안전의 가치를 소중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연구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받고 있는 현 상황에서라면 안전한 실험실의 구축에 앞장서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연구자들은 오직 연구성과로만 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실험실과 실험환경은 노벨상과도 바꿀 수 없는 일상의 소중한 삶이다. 경제적 효율성의 논리로 희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제 과학자들이 경제성과 효율성이 최고라는 미신과 오류로부터 실험실을 해방시킬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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