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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STORY/KIST 소식(행사·연구성과)

쓸데 없는 일..? 사실은 너무 필요한 일이다(5월 창의포럼 후기)

쓸데 없는일..? 사실은 너무 필요한 일이다... (5월 창의포럼 후기)

   


2018년 5월 창의포럼에서는 풍부한 상상력과 신선하고 유머러스한 시선, 감각적 문체로 독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등단 23년차 여류소설가 ‘은희경’ 작가를 초청했다. 작가 은희경(1959~)은 전라북도 고창출신으로 전주여고를 거쳐 숙명여자대학교,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졸업후 출판사에 근무하던 30대 중반의 어느날, `이렇게 살다 내 인생 끝나고 말지` 하는 생각에 노트북 컴퓨터 하나 달랑 챙겨 들고 지방에 내려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이중주』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자, 산사에 틀어박혀 두 달 만에 대표작 『새의 선물』을 썼다. 등단 3년만인 1998년에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 수상하면서 소설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타인에게 말걸기》,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국식 룰렛》 등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96년 문학동네 소설상을 비롯하여 1997년 동서문학상, 1998년 이상문학상, 2000년 한국소설문학상, 2002년 한국일보문학상, 2006년 이산문학상, 2007년 동인문학상, 2014년 황순원문학상 등 안받은 상이 없을 정도로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다. 현재 활발한 집필활동과 더불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야기를 시작하며... >

자그마한 체구에 은회색 자켓과 데님 계열의 푸른색바지, 등까지 내려오는 갈색톤의 웨이브진 긴머리 그리고 의상과 잘 매치되는 멋스런 파스텔톤 줄무늬 머풀러를 매고...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외모로 다소곧이 우리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은희경입니다’ 로 인사를 건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른 시간인데 생각보다 많은 분이 와 주셨다. 이렇게 일찍 일과를 시작하는 것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나도 평소에 지금쯤 일을 시작할 시간이긴 하다. 작가들이 대부분 밤에 작업을 많이 하는데 난 아침에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키운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아침형’이라는 건전한 생활습관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곳이 일산이어서 이곳에 오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여기 KIST 북문에 도착한게 7시 반이었다. 나로서는 굉장히 예외적인 날이다. 그런데 이른 시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벌써 일과를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 하나쯤은 그냥 가볍게 살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 날씨... 커피... 잡념... >

오늘 비가오는 날씨에 이렇게 KIST에 오게 되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씨 굉장히 좋아한다. 왜냐하면 뭔가 이야기가 시작될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지 않는가. 작가들이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라고 하면 ‘아, 역시 감수성이...’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작가들은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다. 감상적이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작가들 만큼 냉정한 사람은 없는거 같다. 냉정해야지만이 휴머니즘을 설득력 있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날을 좋아하는 것은 일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나가놀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일이 좀 잘 된다.

  

오늘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KIST에 왔는데 오늘이 이슬람 라마단 시작일이라고 한다. 여기 와서 아침에 석잔의 커피를 마셨는데 평소하고 비슷한 양이긴 하다. 오늘같이 라마단을 시작을 하면 이슬람 신자들은 새벽 4시부터 밤 7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물도 못 먹는다. 그런데 의외로 고통스러운게 커피를 못 마시는 거라는 친구가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잡념이 많은것도 작가의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말씀드릴 것은 작가들의 잡념 같은것 일수도 있다. 왜냐면 잡념이라는 것은 모두가 한 방향을 가리켜 보일 때 그곳에서는 안보이는 것일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상투적인 것들, 그리고 이미 결정 되어버린 것들, 틀에 갇힌 것들... 그런 것들로부터 되도록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보고 인생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과학자들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이 과학자들을 만나길 좋아하고 수학자의 사랑, 과학자의 사랑 이런 소설들도 꽤 있다. 소설가나 과학자나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야 될 환경, 지니고 있는 어떤 조건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너무나 서로 상반된 방향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서로 매력을 느끼나 보다.

  

< 문학... 도끼로 내면을 깨는것.... >

작가들은 어떻게 다른 방향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또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고민하는지 그런 말씀을 좀 드려보려 한다. <행복에 대한 질문, 문학>이라는 제목을 이곳 담당하는 분하고 상의를 하면서 정했는데 조금 어색하긴 하다. 왜냐면 문학이 행복이라는 것하고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은 불편한 걸 자꾸 들춰내는 것이다. 누구는 그런 말도 했다. ‘문학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내면을 깨는 도끼여야 된다’ 이런 말을 했는데 얼어붙은 내면이라는 것은 그냥 우리가 상투적으로 살고 있는 어떤 삶의 패턴이나 또 우리 머릿속에 굳어져있는 어떤 그 고정관념 같은 것,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혜택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여러가지 특권들까지 포함된다. 쉽게 이야기하면 현재 내가 알고 있는것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그런 보수성이 우리의 내면 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자기자신을 ‘나 보수적인 사람이야~~ 나 다른 사람 말에 귀 기울이고, 타인을 이해하고, 나 열린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그 모든것은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뀐다. 우리 자신이 유기체이기도 하고 모든 환경은 유기물이다. 과학자들 앞에서 이런 말은 좀 이상한거 같지만 어쨌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그런것들... 어떤 의심과 불온함이 문학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패턴이라고 부를수 있는 얼어붙은 내면을 깨주는 도끼가 곧 문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것 같다.

  

만약에 <행복에 대한 질문, 문학> 이렇게 이야기 했을때 그 뜻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 가’에 대한 질문이라면 이것은 자기계발서의 다루어지는 부분이다. ‘무엇이 행복이냐.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면 그것은 인문학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자기계발서의 세계에 빠져있다. 물론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경쟁에서 이기는 법,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는 거, 내가 충분히 어떤 것을 우위를 점하는 것... 그런 방법이 어쨌든 우리에게 굉장히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균형을 잡아주는 <추> 가 바로 인문학적인 생각이라고 난 믿고 있다. 균형을 잡아주는 추가 무거워서 귀찮긴 하다. 하지만 이것이 어딘가에서 내 중심을 잡아줘야지 앞으로 나아갈 때도 나의 좌표를 읽으면서 나아갈 수 있다.

  

< 내 방식의 휴머니즘... >

지금 사회가 너무 자기계발서의 세계 속으로 치우쳐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한다. 예전에는 강연할 때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난 인간이 기본적으로 나약하고 모순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을 위대하다는 어떤 틀 속에 자꾸 넣으려고 하고, 미담을 만들고, 휴머니즘을 강조하고 포장하고 하는 이런 것들이 인간에게 위로가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추악한 점, 모순 이런 것을 그대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 내 방식의 휴머니즘이었다. 소설 속에 정돈된 모습이 아니라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빨래를 들춰보고 이런 식으로 까칠하고 삐딱한 소설을 많이 썼다. 평론가나 독자들이 ‘아, 은희경 소설은 너무 냉소적이다, 너무 페시미스트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난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의 방식이었다. 섣불리 위로를 하거나, 상처를 덮거나, 화해하거나 이런 것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싸울 사람들은 싸워야 하고, 도저히 안맞는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 하고, 그런 것을 냉정하게 보자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그래서 강연을 다닐 때 너무나 좋은 결말을 갖고 그런 것이 위로고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린 조금 더 냉정해져야 된다. 거리를 둬야 된다.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 우리는 너무 한쪽으로 경도되어 있다... >

요즘 강연에서는 무슨 얘기를 하냐면 ‘책을 좀 읽읍시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한다. 오래전에 어떤 의사, 교수 이런 전문가집단에서 독후감 심사를 한 적이 있다. 그 대상이 되는 책이 여러 권 있었는데 거의가 자기계발서에 대한 독후감을 냈더라. 그때 유행이었던 자기계발서가 <감성지수를 높여라>, <EQ를 높여라> 등등이었다. 그런데 정작 고흐의 산문집, 고흐의 편지글, 소설 이런건 안본다. 감성을 키우는데 있어 직접 그림을 보고 또 소설을 읽고 이런 걸 접하면서 자신의 감성지수를 키우는게 아니라 <감성지수를 키워라> 이런 책을 보는 거다. 이제 모든것을 정보로만 여기고 자기 감정이나 자신의 판단도 정보로만 생각하지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어떤 감각이나 통찰 이런 것을 중요하게 안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감성을 키우라는데 감성을 키우라는 잔소리를 읽고 있지 진짜 감성을 키우려고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십여년 사이에 정치적인 것도 있고 사회적인 것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들이 너무 실용적인 세계... 즉 나의 이익을 위해서 ‘경쟁에서 이기는 것’ 이런 것에 대해서 너무 뻔뻔스럽게 경도되어 있는것 같다.

 

< 소설가의 눈으로 보는 우리사회... >

예전에 내가 자라던 시기에 억압을 느꼈던 것은 허세, 허위의식같은 거였다. 예를 들면, 혼을 담은 시공... 무슨 자기 직업에 혼까지 담는가. 모든 것이 허세와 허위의식이 너무 많았다. 경제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던 그 시기에 이런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너무 억압을 많이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래서 그런 허세를 부리고, 어려운 책 끼고 다니고 이런 것을 비웃는 글을 많이 썼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그런게 없이 드러내놓고 자기 욕망, 나만 이기면 된다는 거, 그런 거에 대해서 너무 노골적이 된거 같다. 그게 난 그 몇년 사이 우리 사회가 너무 이렇게 실용적인 것을 강조하고, 자기 이익만 쫓는 그런 경향이 노골화된 이유가 뭔지 너무 궁금하다. 이건 사회학자도 얘기할 수 있고, 정치적인 쪽으로도 분석할 수 있다. 여러가지 관점이 있겠지만 소설을 쓰는 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즉물적인 세계에 빠져 들었나 곰곰히 생각해 본다. 어떤 위기감, 불안도 있고 자기욕망이 실현되지 못할거라는 것에 대한 자기방어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자기 자신의 좌표를 읽지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렇게 얼어붙어있는 얼음덩이(내면) 즉,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세계 안에서 그 시스템 안에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려고만 한다. 이 시스템이 왜 잘못됐는지, 이 시스템이 뭘 어떤 식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는지...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안하게 된거 같다. 난 그런 질문이 정말 진정한 행복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인문적인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 좌표를 읽는 어떤 생각의 사생활이 없고 자기 스스로가 뭔가를 생각해서 자기를 알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자꾸만 자기계발서같은 것에 조언을 구한다. 멘토를 찾고 하는것이 자기 스스로가 선택하는 삶에서 멀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 >

소설을 읽는 독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요즘 현실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어서라고? 인터넷 때문이라고? 일부만 맞는 말이다. 소설을 안 읽는 것은 최근의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이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현실이 힘들수록 더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우리 모두 스펙을 쌓고 취업을 하고 생활비를 벌고 자리보전을 하기 위해 눈앞의 손익계산을 위주로 살아간다. 소설을 읽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아리엘 도르프만은 소설가이다. 그는 1973년 피노체트가 군부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칠레에서 들었다.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그가 대사관으로 달려갔을 때 거기에는 천여 명의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혁명을 꾀하다 감옥에 갇히고 고문과 추방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밖으로 한발짝만 나가면 대사관을 포위한 군인들의 총에 맞을지도 모르는 고통스럽고 극적인 상황. 그들은 결코 한가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도르프만은 서른 명쯤 되는 난민들이 모여 큰소리로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돈키호테는 스페인 라만차마을에 사는 한 샌님의 이야기다. 그는 기사이야기에 심취한 나머지 즉, 소설을 많이 읽은 탓에 망상에 빠져 스스로를 기사로 칭하고 모험을 떠난다. 풍차를 향해 돌격하고 가상의 공주에게 구애하는 희극이 펼쳐진다. 그럼 도르프만이 목격한 난민들은 긴장을 풀고 웃으려고 돈키호테를 읽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군인이었다. 전투 중에 왼팔을 잃었고 해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지하감옥에서 5년을 보냈다. 천신만고 끝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를 맞아준 것은 냉대와 괄시뿐. 그러나 그는 썩어빠진 스페인 사회를 원망하고 욕하는 대신 그것을 풍자하여 자유분방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그 책의 서문에서 ‘한가하신 독자들에게’ 라고 씌여있다. ‘한가하신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지상의 모든 불편이 도사리고 온갖 비통한 소리가 모여 있는 감옥에서 수태되었다’ 바로 그것이다. 고통스럽고 급박한 상황에서 난민들이 돈키호테를 읽는 것은 험난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발휘한 세르반테스를 본능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닥쳐오는 불운에 속수무책이지만 고난에 맞서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과 존엄성을 인간은 갖고 있다. 바로 그것을 깨우쳐 주기 때문에 소설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힘이 될 수 있었다고 도르프만은 말한다. 개인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찬양하고 실천하는 돈키호테의 정신이 위기에 몰린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소설을 읽는 일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맞는다. 소설은 돈 버는 일이나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소설은 그런 일에 내몰리느라 개인의 자유가 속박당하는 시스템에 저항한다. 우리가 남이 조종하는 대로 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데 가장 강력한 응원을 보내는 것이 문학이다. 시스템에 따르지 않으니 효용성이 없을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예술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불온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별 의미가 없다. 세르반테스가 제시한 비전은 그의 글에 한마디로 표현돼 있다.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것...’ 이 문장을 독자들을 위한 한가한 잔소리로 추천하고 싶다.

  

< 예술, 문학은... 고정관념을 깨는것이다... >

이렇게 문학이나 예술은 지금 결론이 이미 나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들을 계속 깨뜨린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템에 저항한다. 이 시스템 안에서 성공하려는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치고 혹은 이 시스템이 인간에게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전향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아이디어와 계기를 주는 발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과 같은 예술이고 인문학이다.

  

‘야, 지금 이렇게 살기 바쁜데 한가하게 무슨 소설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불가능한 현실 같지만 거기서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서 역사가 바뀌어 왔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없었으면 지금까지도 신분제도 그대로 있고, 여성한테 참정권도 없었을 것이다. 신분사회에서 누군가가 ‘어 왜 이렇게 신분이 정해져 있어? 이거는 좀.. 인간 다 똑같은데 기회가 이렇게 안 주어진다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분명히 그 사회에서 불온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없었으면 지금과 같은 현재는 없었을 거다. 그런 시스템에서 계속 ‘너 안 돼. 지금 네 신분에 맞는 일을 해야지. 그게 지금 바람직한 일이고 모두가 바라는 거야’ 이런 말에 안주했다면 우리는 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자꾸 잊어버린다. 왜냐하면 현실에 자꾸 적응하려고 하는 것이 쉬우니까.

  

< 누구나 보수가 되기 쉽다... >

대다수에 속해 있는게 쉽기 때문에 그렇게 보수적이 되어간다. 대다수에 속해 있고 어떤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면 다른 사람 말을 듣는게 불편해진다. 그러면 점점 편한 사람들끼리만 만난다. 우리끼리 얘기하면 다 우리끼리는 다 맞는 말이다. 그러다보면 자기 확신이 생기고 다른 사람은 틀린것이 된다. 점점 계층은 나눠지고 반목하게 된다.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가 자기 스스로는 ‘나는 유연하고 나는 열려있고 남의 말 다 들을 마음이 있어. 우리 소통하자. 우리 대화 나누자’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대화로 풀자’ 라는 말은 ‘너 내 말 좀 더 들어봐. 내 말이 맞는거야’ 이런 얘기에 다름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와 약자들이 가만히 있어서 유지되는 평화라는 것은 불합리하기도 하거니와 굉장히 불안정한 시스템이다.

  

어쨌든 간에 ‘어 이상하다? 지금 이게 맞는 건가? 지금 내가 잘하는 건가? 이렇게 가는게 괜찮은 거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나 문학이란 얘기다. 문학이나 기초예술 분야는 어쨌든 계속 현재를 갱신하는 것이 그들이 하는 일이다. 어떤 영화감독이 ‘인간은 다 억압 안에서 살고 있어요. 왜냐면 어떤 시스템에 맞춰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또 경쟁에서 이겨야 되기 때문에... 하지만 본인들은 매일매일 일과가 바쁘고 이런 시스템이 워낙에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있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

 

< 인간... 누구나 위로와 되돌아봄이 필요하다... >

예술가들은 그 억압을 관찰하는게 그들의 직업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인간을 억압하는지. 빅데이터에서 이건 어떠세요? 하고 살 물건을 추천을 해준다. 내가 딱 필요했던 물건인데 좋네~~ 하다보면 계속 구매하라는 것을 사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왜? 편리하니까. 편리하다는 것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기득권 안에서 자기 자리를 공고히 하는 거다. 이런 중에서 누군가가 너를 지켜보고 너를 조종하는 것일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것이 문학이다.

  

가정을 예를 들어보자. ‘이만하면 우리 가정은 잘 꾸려지고 있어. 왜냐면 내 아내는 굉장히 살림도 잘하고, 내가 원하는 걸 탁탁 알아서 해주고 정말 현모양처야. 우리 애들도 잘 크고 있고 공부도 잘하고 있고 나한테 반항도 하지 않고 뭐 이만하면 잘 되는 거겠지!’ 그랬을 때 어떤 소설은 ‘그럴까요? 당신 아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집에 있겠지.’ ‘그럴까요?’ 그런 생각을 자꾸 의심을 품게 해준다. 그러니까 불편하고 알기 싫다. 인간사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평온하지 않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아... 이 문을 열기 너무 두렵다’ 하는 생각으로 만나야 될 사람이 있고, ‘내가 모르는게 뭐 있어.’ 이런 잘난 사람에게도 깜짝 놀랄만한 일은 매일 벌어진다. 아무리 친구가 많고 모든걸 갖추고 있다고 해도 ‘아.. 정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없을까. 지구상에 누군가 한사람만이라도 지금 깨어서 내 고민을 들어줬으면~~’ 하는 순간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순간이 일상에서 시간적으로는 조그만 부분이다. 하지만 이 균열은 우리라는 인간을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고 결국 그런 것들이 중대한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 그런 것을 봐주는게 바로 문학이다.

 

< 소설은 생각의 근육... 감정의 근육을 만든다... >

네가 원하는 인생이 뭔지, 네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거기에 맞는 생각을 하고 거기에 맞는 어떤 인생을 살아라’ 라고 하는것이 실제로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어떤 시스템 속에 대해 내 안정된 위치를 흔들지는 모른다. 이것이 바로 좀전에 말씀드린 대로 어떤 <추>이다. 묵직하고 귀찮지만 나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 이제 우리가 ‘그런걸 깨우쳐 준다면 나도 소설 좀 읽어봐야지’ 모두가 같은 얘기를 할때 ‘그럴까요?’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면 나도 한번 읽어봐야지 하는 분이 계실거다. 어렵지 않다. 조금의 훈련이 필요할 뿐이다. 모든 것은 다 훈련이 필요하다. 그림을 보는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이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글을 안다고 문학 작품을 금방 알겠는가. 조금 읽어봐야 된다. 왜냐면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어떤 미적인 도구를 가지고 알려준다. 그냥 ‘재난에 처한 사람하고 그 가족과 자연재해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을 우리가 도와야 된다.’ 이렇게 한마디로 하면 될것을 소설은 몇권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루키라는 일본작가를 많이 아실 거다. 하루키가 쓴 소설 중에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라는 소설이 있다. 중편소설 몇개를 묶은 책인데 고베 지진에 관한 얘기다. 그런데 그 소설에 지진 얘기 하나도 안 나온다. 작가들이 어떤 사건을 소재로 할때 자기 방식으로, 자기 미의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어떤 작가는 다치고 죽고 이런 사람들에 대한 비극을 쓸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어떤 죄의식이나 이런 걸 쓸 수도 있을거다. 근데 하루키는 어떤 걸 썼냐면 지진 얘기 하나도 안 나오고 그냥 평범한 일상이다. 평범한 일상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어떤 사람은 홈리스로 살아간다. 알고 보면 그사람은 안정된 직장도 있고 가족도 화목하게 별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 근데 이 사람이 혼자 떠돌고 있다. 왜 그러냐면 뭔지 자기가 그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거에 대한 어떤 죄책감을 계속 느끼는 거다. ‘지진 이후에 이 사람은 사회적인 무엇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설명 안 하는게 문학이다. ‘아 왜 설명을 안 해주는 거야. 그래서 왜 이 사람이 이러는데’ 하는 것을 독자가 알아가는 동안에 스스로 어떤 재난에 대한 비극도 인식하게 되고, 소중한 것을 잃었던 사람들하고의 연대감, 그 사람의 고통에 연대감을 느끼게 되는 거다. 이런 것이 문학의 방식이기 때문에 픽션이라는 것은 읽는 사람이 생각할 자리를 많이 만들어 놓는다. 내가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귀찮은 거다. 하지만 그것이 내 생각의 근육, 내 감정의 근육을 만들어 준다. 우리가 어떤 어두운 문 앞에 서 있을때 두려운 상황...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은 고독감.. 그런것이 잠깐 스칠때 나한테 내 자신의 강함을 일깨워준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이 뭔가 각성을 주는 거다. 난 그것을 ‘당신의 통각을 찾아준다’ 라고 표현한다.

 

아까 돈키호테에서도 봤지만 대부분 우리는 계속해서 이시스템 안에서 그냥 살아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먼 데에서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럴때 자기를 좀 멀리서 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문학이다. 철학책도 마찬가지다. 장자를 읽어보면 ‘나는 여기서 이정도는 실수해도 되겠구나. 이정도는 조금 실패해도 되겠구나’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줄만큼 커다란 그 어떤 스케일을 체험하게 한다. 조금 방식은 다르지만 문학도 조금 더 멀리서 자기를 보게 만든다. 왜냐면 내가 이 시스템 안에서 사고하던 그 방식이 아니니까.

  

<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라는 소설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거다. 영국의 맨부커상 중에서 외국문학에 주는 상. 그 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그 책이 또 소설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소설을 읽게 만든 경우이기도 하다. 그 소설을 보면 채식주의자라는게 물론 채식을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남편의 시점으로 쓰여 있다. 읽으신 분들도 있을거다. 남편이 한마디로 나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고 나는 잘하고 있다는 식이다. 그리고 내가 잘한 것 중에 나는 결혼도 좀 잘한 편인데 나는 예쁜 여자도 싫고, 똑똑한 여자도 싫고, 그냥 나를 잘 보필하고 나를 위해서 가정을 잘 이끌어줄 여자를 원하는데 우리 아내가 그걸 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아무 불만 없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아내가 자기가 이제 고기를 안 먹겠다고 하면서 나한테도 고기반찬을 안 해준다. 내가 보통 불편한게 아니다. 그래서 심지어 직장상사하고 부부동반으로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자기 아내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이러니까 분위기 싸해지고 남편이 너무 분노가 치민 거다.

 

이 남편 공감된다. 자기 장인 장모한테 다 고자질을 한다. 그러니까 장인 장모 다 ‘이런 기집애가 지가 뭐라고 남편을 고기를 안 해주고’ 이렇게 된거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막 야단을 치면서 억지로 고기를 먹인다. 결국 병원에 가고... 그 뒷얘기는 중요하지않다. 이렇게 다 스토리를 말한다고 해서 이게 스포일러가 아니다. 문학작품은 줄거리가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것을 이끌어가는 이야기 속에 배어있는 작가의 생각이다. 즉 작가의 주장이다. 줄거리로만 보면 ‘아 이 여자 왜 이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뭐 좀 남편한테 고기도 해주고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지.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여자는 폭력을 거부한 거다. 단순히 어떤 육식의 폭력만이 아니다. 남편이 자기를 대하는 방식. 아내를 하나의 역할로만 보는 거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AI가 와서 그 역할을 해도 괜찮은 상황이다. 누군들 AI를 부리고 싶지 자기가 AI가 되고 싶겠나. 아내의 삶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거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에 흐르고 있는 폭력에 대한 고발이 있다. 어린 시절 개를 잡던 군인출신 아버지의 그 야만성... 그리고 그 아버지가 이끌어온 가부장제 안에서의 자기가 순종해야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다운 인생을 살 수 없었고, 아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대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던 자기 인생에 대한 어떤 그 공허감, 두려움 그런 것들이 들어 있다.

 

남성들만 있는 경영자 강연에서 그 소설의 앞부분을 소개했을때 그분들이 그 남편이 뭐가 문제냐고 이렇게 얘기를 하다가 나중에 뒷부분을 알려드렸을때 ‘그 소설 한번 읽어보고 싶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근데 그 소설 읽고 실망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런분들은 더 읽어야 된다. 왜냐면 아직 게임의 룰을 파악을 못한 거다. 소설이라는 것은 성공담이 아니다. 실패 이야기이다. 소설은 문학은 아웃사이더, 소수자, 실패자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성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실패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럼 이 세상이 실패자로 다 가득 차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왜 실패했는가를 분석해서 다음에는 성공하려고? 절대 그게 아니다. 성공이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주입하고 그 성공에 따르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받고 있는 억압들... 그런것에 대해서 깨우치게 하는 거다. 모든 작가는 휴머니스트이다. 인간에 대해서 애정이 없으면 소설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인간이 뭔가, 인간의 삶은 뭔가’ 이런 것을 관찰하고 이야기로 만드는게 소설가이다.

 

< 쓸데 없는일... 사실은 너무 필요한 일이다... >

어떤 장애를 이겨내고 뭘했다, 역경을 이겨내고 뭘 성공했다 그러면 그걸 보면서 우리 인간은 역경을 통해서 위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에 있는 어떤 실패담을 보면 인간은 약점을 통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난 두 깨달음이 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노력을 해야 되는 쪽인 자기개발서의 세계... 즉 역경을 극복하고 위대함을 찾는 세계에 경도돼 있다는게 문제다. 약점을 통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다는 세계로 조금씩 끌어내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성공담이 나한테 어떤 인간애를 더 막 고양시키는게 아니라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공원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거나 아이들 교육을 하거나 다 뭔가를 하고 있다. 휴식이라곤 하지만 모든게 한 순간도 내가 지금 헛되게 보내면 안돼... 하는 이런 강박을 다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지금 오락을 하는데 순수하게 즐기기 위해서 아니라 남들은 이거 한다는데 나도 좀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하고있는게 문제다. 멍하게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드는것이다. 근데 멍한 시간이 많아야 된다. 그런데 공원에서 다들 무언가를 열심히 히고 있었는데 “와” 하면서 일제히 하늘을 보더라. 무지개가 뜬것이다. 다들 무지개를 보면서 좋아하는 그 장면에서 막 인간애가 샘솟았다. 이 쓸데없는 일을 할때 그럴때 인간이 자기가 되는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우리는 뭔지 시스템 억압 속에서 살아남거나 성공하거나 유리한 자리를 차지한다는데 너무 쫒기는 것 같다. 어떤 평범한 생각 속에 묻혀있는 게, 다수의 어떤 생각 속에 묻혀있는 게, 내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만 그것이 나의 행복은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게 내가 여러분께 하고싶은 말이다.

  

< 소설... 새로운 관점의 제시... >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이 있다. 우리가 페미니즘책 하면 무슨 굉장히 핍박받은 여성이나 비극에 처한 여성들이 자기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이야기는 그냥 약간 사회학적인 상상일뿐이다. 문학적인 상상은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 문학적인 상상은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는 통각을 깨우려는게 문학이다. 어떤 비극적인 독특한 상황에서의 인간애라 하는 이런 것은 조금은 새로운 발견이라기 보다도 약간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약간 가깝다. 사실 북한 문학은 그런게 많다.

  

소설의 이야기를 보면 주인공 여성이 중산층 여성이다. 아무 부러울게 없이 보인다. 으리으리한 집에 살고, 남편도 전문직이고, 아이들도 좀 컸고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데 이 여자가 자기 방을 원한다. 여성들에게 자기 방이라는게 굉장히 의미가 크다. 버지니아울프의 ‘자기만의 방’ 산문집에 보면 여성은 자기만의 방과 식당에서 마음껏 쓸 수 있는 20실링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말은 여성의 어떤 자기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 돈을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20만원쯤 된다고 한다. 어쨌든 그 사람도 평범힌 사람은 아니었던 거다. 그 규모가 어쨌든 여성들에게 제일 중요한게 자기만의 방과 그냥 생각없이 쓸 수 있는 그 정도의 돈이다 말했을 정도로 중요한 거다. 왜냐면은 자기라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공간이니까...


근데 ‘19호실로 가다’에서는 주인공 여성이 자기 방을 갖기를 원한다, 물론 남편에게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이 허락하는 방 그런 방은 자기 방이 아닌 거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여관에 19호실을 정해 갖고 정기적으로 그곳에 간다. 가서 그냥 가만히 있다 오는 거다. 무엇을 하기 위한게 아니라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니까... 근데 그걸 남편이 알게 됐다. ‘왜 그러지?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하고 뒤를 밟고...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그 얘기에서도 이 남편이 이해를 못한다. 부족한게 뭐가 있어서 이러는 걸까? 나한테 말하면 다 해결해 줄 텐데. “너한테 말 안하고 싶은 게 나의 자유야”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이해를 못하는 거다. 가족인데, 사랑하는 사람인데, 나는 내 아내에게 정말 부족함이 없이 모든 사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거다. 근데 남편(보수)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되는 거지만 다른 관점을 문학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굉장히 다른 여러가지 관점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방식하고 다른 방식으로 노숙자를 보고, 다른 방식으로 재난을 보고, 다른 방식으로 행복에 대한 개념에 대해 생각하고... 자꾸 다른 방식의 것을 제시한다. 작가들 전부 평소에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어떤 이야기들을 쓴다. 그래서 문학작품들 속 인간들은 전부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이때 왜 이러는 거야? 너 그여자 사랑하잖아. 그 여자가 지금 너 좋다는데 왜 떠나? 같이 살면 되잖아...‘ 현실에서는 그게 굉장히 쉬운 것 같지만 그 사람의 내부로 들어가면 그것은 좀더 복잡한 문제인 거다. 그런 복잡함을 자꾸 일깨우고 다른 방식으로 하게 하는게 문학작품이다. 그러면 결국 많은 작가들이 인간을 관찰하고, 연구해 보니까 ’이러기도 합디다‘ 라고 소설로 쓰는거다. 어떤것들은 내 생각하고 비슷하고 나를 깨워주지만 어떤 것들은 나랑 전혀 다르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면 약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 마무리 말... >

그럼 어떤 책을 읽어야 되나 하는 문제에 부딛친다. 오늘은 책을 추천하지 않을 거다. 왜냐면 옷처럼 책도 다 자기에게 맞는 책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작가가 되던 시기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모작가가 있었는데 10년 전에 읽었을 때에는 이해를 못해 읽지 못하고 그냥 내려놨다. 그런데 10년을 더 산 다음에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은 사유의 틀이 늘어났을 때 그 작가가 이해가 됐다. 그래서 사람은 각자 다 다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나한테 반드시 좋으란 법이 없고 싫으란 법도 없다. 그래서 책을 추천할 순 없지만 그런 것을 꾸준한 독서로 책을 많이 접하는 기회를 통해서 자기에게 맞는 작가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문학이라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다른 접근 방법을 떠오르게 하고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을 깨는 것이고 그래서 불온하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결국 불온함이 우리의 작은 균열 같은것... 그런것에 대해서 각성과 위로를 동시에 준다. 모든 문학작품이 다 작가가 인간을 보는 방식이다. 그런 방식이 많아지면 그만큼 유연질것이다. 어느 프랑스 철학자가 이것을 ‘문학 작품에서 자기 이해를 벗어난 존재를 만난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이해의 시작이다. 지금까지 나를 보호해 주었지만 그만큼 폐쇄적이었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 그것이 삶의 치유이고 문학이다’ 라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오늘 이 문장을 강연의 결론으로 삼고싶다. 경청해 주시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