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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그거면 됐다


저녁이 힘을 잃을 즈음, 격정적이었던 흐름들은 이곳에서 잠잠해진다. 차분한 공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흩어지는 그 시간의 가로등 빛을 나는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차분함 속에서 차분하지 못했던 하루를 생각한다.

이곳에서의 차분하지 못했던 날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픔을 엄살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일종의 강박을 남겼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것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며,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은 용케도 나의 작은 두 귀까지 흘러 들었고, 그것들은 생각보다 감미로웠으며, 다만 나는 반사적으로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의 선택에 더욱 강한 확신만을 더했다.

순수치 못했기에 순수하려 애썼다. 시간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쌓였고 그렇게 쌓여간 두께만큼 이 곳에서 부대끼며, 나는 이 길이 최선인가를 묻기보다 어떻게 더욱 탁월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곳도 세상만큼이나 복잡했으며 말들은 여전히 차고 넘쳤다. 그리고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크기의 능력과 담대함으로 중요하고 엄청난 일들을 해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슴 아픈 이별 뒤, 그래, 사랑했으니 그것으로 됐다, 하는 생각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열렬히 사.랑.했으면 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좋아하면 그것으로 됐다. 그런 마음뿐이더라도 이미 충분한 거다.'
 하는 생각이, 어려운 문제를 멋지게 풀어낸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당당할 수 있었던, 필요성은 차치된 채 그저 요구되는 그 요구에 열심으로 응대했던 학창시절의 단순함과 너무 닮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느낌 때문이다. 때때로 버거워하는 나 자신과, 이미 내가 겪은 것들을 이제 막 겪기 시작한 사람들이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허덕이는 자체가 엄살로 보였다. 잔인하다. 이제 나는 더 큰 세상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 학창시절의 과오를 똑같이 범할 수는 없다는 한낱 자존심으로. 그렇게 고요한 밤, 홀로 느슨함 속에서 많은 날 생각했지만 나는 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그리고 언제까지나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어중간한 위치일 것 같은 답답함과 함께,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연구에서든 연구를 위한 그 무엇에서든 자신감을 잃는 순간이 잦았다.


작가 김훈을 좋아한다. 그의 글은 몇 문장만을 따로 떼어놓아도 그저 그것으로 아름다워서 나는 그의 문장을 열렬히 사랑한다. 특히 소설 '칼의 노래'의 작가서문을 제일 좋아한다. 주인공보다 오히려 엑스트라에 마음이 가는 괴팍한 취향이다. 그는 생각이 깊은 사람 같았다. 오랜 기간 동안 글을 쓰며 고요히 가라앉아 진액같이 되어버렸을 상념들을 그는 전혀 의미의 연관이 없어 보이는 몇 개의 문단으로 토해냈다. 나는 그 몇 개의 문단을 하나의 전체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문단, 한 문단의 아름다움에 집중했고, 이후,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개별적인 아름다움들은 묘하게 전체로 빛났다. 하나의 흐름에 놓이지 못한 줄로만 알았으나, 그것들은 여전히 그의 글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만큼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현재의 나에게 충실하면 타인에게도 더욱 관대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밤을 걸으며 어느 날 생각했다.


어쩌면 삶이란 느슨한 여유나 느슨하지 못한 긴장에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절묘하게 있는 것이 맞을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가 “DENSE”할수록 흘려 보내지지 않고 흘러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곳에는 여유와 긴장의 극단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어떤 이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묘미가 있다며 한껏 호기를 부려보고는 혼자 안도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꽃내음은 차분한 밤도 아랑곳 않고 날린다. 

2011.04. 지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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