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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왕뚜껑 먹고 그냥 버린 아이


공기조차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심호흡을 해 보아도 별 소득이 없다. 아무래도, 이 곳에서 몇 년이 지나도록 내로라 할 실적이 없다고 자책하는 것이 그 적정선을 넘은 것 같다. 사실 이 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저마다 평가와 승급, 졸업과 진학을 앞두고 있으니 누군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냐만, 유난히 가족 같이 따뜻한 팀 안에서 자기 앞가림은 물론 팀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까지 들 때면 지금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산소가 21%, 온전한 양으로 진정 들어있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얼마 전, 서울의 공기가 흙빛처럼 느껴져서 오랜 친구 J와 함께 강원도 정선으로 떠났다. 매일 무거운 공기를 들이키고 달짝지근한 소스를 두른 샐러드만 먹다가 그 곳의 푸른 공기와 향토음식을 대하니, 사람은 역시 이런 곳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마냥 좋아하다가, 이게 바로 나이가 들고 삶에 찌들어간다는 징조가 아닌가! 하는 억울한 생각에, 어떤 반응이 현재의 내 나이와 가장 어울릴지 연신 따져본다.

날이 어두워지고 낯선 버스정류장에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만난 한 아이는, 왕뚜껑 라면을 먹으며 형들은 어디까지 가냐고 제가 먼저 묻는다. 버스 시간이 꽤나 많이 남은 우리에게는 반가운 손님이다. 이 반가운 손님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넉살 좋고 당당하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눈높이가 맞아야 하는 바, 우리는 그 순간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의 마음을 덧입고선 그 아이가 반에서 줄곧 1등을 하고 영어와 플루트 학원을 다니며 장래 희망이 생명공학자라는 것을 잘도 알아낸다. 물론 우리의 정보도 어느 정도 제공해야 했는데, 전국 대학생 광고대회 수상자, S대생 연구원 따위의 되지도 않는 타이틀로 환심을 사는데 성공. 그러는 동안, 아이는 왕뚜껑의 면발을 전부 해치웠고, 국물과 용기는 의자 밑에 가지런히 둔다. 이 녀석 보게나.

 "생명공학자는 우선 생명을 사랑해야지. 라면용기를 아무데나 버리면 안 될 텐데?"

친구 J의 억지스러운 말에 아이는 순순히 라면 국물과 용기를 들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하는데, 당돌한 말로 대꾸할 것을 예상했던 나는 넉살 좋고 당당한 아이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는 한편, 그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마음이 덜컹 흔들렸다. 이름대로 생각하고 이름대로 살면 되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스쳐서 부끄러운 마음이 인다. 아이가 타야 할 버스가 왔고 손을 흔들며 아이와 작별한 뒤, 우리는, 정선에도 파리바게뜨가 있다는 둥 시골 시장에는 어디든 프로월드컵 매장이 있다는 둥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아이의 빈자리를 채웠다.

연구원은 연구하는 사람이기에 연구가 우선이며, 그 우선이 더욱 우선 될 수 있도록 힘쓰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렇게 힘쓰며 하나씩 더하다 보면, 어느 순간 차고 넘쳐서 남들과도 좋은 것을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역시 바람직한 순서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서야 겨우 마음에 둔다. 나이가 들어도 이 당연한 사실은 계속 마음에 두고 살고 싶다. 그 아이는 그 곳 버스정류장에서 또 다시 라면을 먹을 텐데, 내 친구 J가 일러주지 않아도 라면용기를 잘 버리는 착한 아이가 될까. 쓰레기통에 잘 버렸으면 좋겠다. 몰랐다면 괜찮지만, 알게 된 뒤에는 이제 오롯이 양심의 문제일 테니까. 물론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