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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STORY/KIST 소식(행사·연구성과)

이덕일 창의포럼(11.16)

 

단호한 어조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역사의식을 강조하던 고등학교 시절 국사선생님이 생각났다. 선대의 발자취인 역사를 되새김질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과거에 매몰되어 미래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일처럼 여겨질 수 있다. 현대사에 대한 국사교과서 서술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인조반정이라는 역사의 거울

이덕일 소장은 역사는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본다는 점에서 현재학이며, 또한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학이라고 했다. 몰락해가는 명과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취했던 광해군을 서인들은 숭명배금(崇明排金)을 명분으로 내쫓았다.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최강대국 미국과 신흥대국 중국, G2 틈바구니에서 어떤 외교정책을 구사하는 것이 유리한지 우리는 인조반정이라는 역사의 거울에 물을 수밖에 없다.

 

병자년에는 왜 의병이 없었을까?

곽재우, 김시민, 조헌, 고경명, 정인홍 등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거병한 의병장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정묘년과 병자년 후금이 침략했을 때 거병한 의병장을 기억하지 못한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류성룡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면 면천 혹은 양반의 신분을 부여하는 면천법을 도입하고 양반과 상민을 같은 군에 편제하는 등 의병이 거병할 수 있는 물적토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종료와 함께 신분질서는 다시 양반사대부중심으로 회귀하고 난세에 나라를 구한 류성룡, 이순신 같은 영웅은 대접은커녕 삭탈관직,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이런 역사의 거울이 있는데 어떤 이가 병자년에 의롭게 나라를 구한다고 거병을 하겠는가?

 

북벌론자에서 사문난적으로

청의 내부혼란인 삼번의 난을 기회로 강하게 북벌을 주창한 백호 윤휴는 2차 예송논쟁(국상 때 상복을 몇 년 입는가에 관한 논쟁)으로 남인이 권력을 잡자 정계로 진출했다. 윤휴는 북벌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양반도 군역부담을 해야 하며, 양반사대부 중심의 신분제도를 완화시켜 백성들의 신분상승을 허용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계급이 동일한 신분증명서를 소지하는 지폐법(당시 호패는 신분에 따라 다르게 소지)을 도입한 것도 견고한 신분질서의 틀을 깨기 위한 당시로서는 혁신적 조치였다. 그러나 청에 의해 삼번의 난이 진압되고 북벌론이 힘을 잃자, 다시 송시열의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되고 윤휴는 주자의 절대교리에 대항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죄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윤휴의 죽음과 함께 주자 이외의 다른 학문을 꿈꾸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고, 주자학과 다른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은 강화도와 같은 곳으로 스스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신흥무관학교 100년

 1910년 당시 세도가들은 일본에 나라를 판 대가로 귀족작위를 받았다. 윤휴의 죽음 이후 계속 권력을 유지했던 서인이 그들의 뿌리라고 이덕일 소장은 말했다. 또한 그는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도 서인의 후예가 만든 역사프레임에 갇혀 북벌의 주창자가 송시열이라고 배우고, 친일파가 만든 주류사관인 식민사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악취 진동하는 친일파가 득세한 역사 속에서도 희망은 있었다.’ 고 말했다. 우당 이회영 일가, 이상룡 일가, 강화학파 등은 전 재산을 처분한 후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투쟁을 전개한 사실이 역사의 거울에 비친 희망이었다. ‘그 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라고 이덕일 소장은 강조했다.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우리가 역사 속의 인물이나 정치세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다. 양반사대부 중심의 계급제도가 철폐되어야 한다는 역사발전의 관점을 가진다면 그런 평가의 수고로움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관점은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연구자에게도 필요하다고 했다. ‘학문은 도그마가 아닌 그 시대의 사고를 반영해야 한다’라는 실로 평범한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