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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나에게는 그 어떤 명예가 남을까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가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 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심보선,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中)

 

소년, 소녀를 나이로 규정짓지 않는다면 요즘에도 소년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새가 지저귀고 공기가 시원한 아침, 그 환해질 때의 세상은 솜털같이 포근해서 잰 걸음으로 보냈던 나날, 우왕좌왕하던 마음을 부끄러워하며 잠시 그대로 있는다. 또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꽃잎은 시들어도 여전히 꽃잎이듯, 우스꽝스러운 나의 삶이 파편처럼 뒹군 때에도 마치 햇살이 뒹굴고 간 것처럼 의미를 부여 받고서 강아지처럼 좋아한다.

 

허나, 그 순간들에 비해 하루는 너무 길고 오랜 침묵의 시간들은 나에게 매일 할당되어 있다. 이제 어른답게 살아야 하는 시간이다. 나는 평생 무엇을 하며 살고 싶나, 무엇을 해야 행복할까, 그것은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한다.

 

대답은 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르는 것처럼 나의 하루가 자꾸만 흘러가는 것 같아 불안하였다. 하여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바라는 것이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였을까. 질문 없는 답을 들고 지내다 보니 숭고함을 미덕으로 여기던 젊은 날이 서서히 식어갔다.

 

꼭 불확정성의 원리 같았다. 운동량과 위치 중 그 어느 하나만 정의될 수 있는 것처럼, 질문과 답은 나에게 동시에 얻어지지 않았다.

만화 심슨네 가족들(The Simpsons) 중에서 아들인 바트 심슨이 대학원생을 흉내 내며 엄마(마지 심슨)와 나눈 한 대화는 많은 대학원생을 울렸다.

 

바트심슨: 이것 봐라. 난 대학원생이지. 난 서른 살이야. 작년에 60만원 벌었다!
마지심슨: 바트! 대학원생 놀리지 말거라. 그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뿐이야.

 

그러나 우리는 단지 우는 척을 한 것뿐이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자신의 소신대로 진로를 선택하였고, 행복한 미래를 위한 투자로 그 인고의 시간을 갈고 닦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만화를 보고 웃을 수 있었으며, 오히려, 우리의 고충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 알게 되었다는 것에 작은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서 나이 많은 게 무슨 자랑인지 선배들은 자신의 나이를 이야기했고, 다같이 ‘아주 조금’ 교수님 흉을 보고 다시 실험을 하러 갔었다. 지금 돌이켜보건대, 학교에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교수님의 보호 아래에서 평온히 생활했던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것처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약 3년 동안의 연구소 생활을 통해, 바로 옆에서 박사님들께서 연구하시는 모습을 보며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선택한 길을 가기 위해서 미래의 나는 더욱 강한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렇게 미래의 나를 그리며 항목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꼽으니,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졌다. 그것들은 대강 이러하다.

 

한국에서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과제 수주, 연구 수행, 실적, 멀티 플레이, 평정심 등등의 능력 내지는 성품이 동시에 요구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것’에서 동기가 부여된다고 하면, 다음으로 그것이 학계나 산업계에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며 나아가 과제 수주가 가능할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자, 축하합니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과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연구를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으나 과제 하나로는 평가 등등의 것들이 감당되지 않으니 이제 두 번째로 과제 수주 가능한, 의미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찾아 도전한다. 그렇게 몇 번의 과정을 반복하면 이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데 그 행복을 잠시 맛보고 실적을 쌓을라 치면 보고서 및 연차발표의 시즌이다.

 

참여 연구원들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집결하여 마감 시간까지 최선을 다합시다. 다만, 다만, 저에게 평정심을 주시옵소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였을, 부정하고 싶으나 부정하기 쉽지 않은 순환고리.

 

단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시작했더니 전방위로 요구되는 것들이 많았고, 성심껏 수행하였더니 정작 나에게 남은 에너지가 없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놓치게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과연 행복할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과연 진리인가. 연구를 하려면 이러한 희생에 익숙해지는 연습은 필수불가결한가? 이것들을 가능케 하려면 과연 연구에 콩깍지가 씌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실험을 설계할 때, 재미있는 결과들과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 결과가 논문이라는 결실을 맺었을 때 아직도 나는 부족한 내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주변에 계시는, 질문과 답을 함께 가지고서 놀라운 균형감각과 능력으로 당신들의 삶을 연구로 채우고 계시는 많은 연구자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이 커질 뿐이다. 이제는 내 차례일 것이다. 웃음소리는 크나 그 냄새는 무척 나쁜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내 삶에 어떤 명예를 남길까? 그 때에도, 나는 소년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