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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기자가 본 과학' - ‘뇌의 착각’ 선택맹 또는 변화맹

 

 

 

                                                                                                               

“뇌는 무엇보다 이성적이고 기계적이며 정확하게 작동한다. 사람이 실수를 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 때문이다. 뇌가 정확한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면 더 많은 실수를 막을 수 있다.”

 

서울 신문 박건형 기자가 뇌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현재 과학계의 가장 큰 화두는 ‘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014년 회계연도 예산이 ‘뇌 연구’와 관련해 1억 달러를 책정하겠다고 발표했고, 유럽연합(EU) 역시 ‘인간 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계적 경제위기가 이어지면서, 연구비에 목마른 과학계에는 단비같은 소식이다. 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유전자인 DNA를 통해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려던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한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로봇이나 스스로 사고하는 컴퓨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생명의 신비를 한꺼풀씩 벗기는 것보다는 아예 그 중추가 되는 ‘뇌’를 직접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확하지 않다. 스스로를 왜곡하거나 선택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주인이 모르는 사이에 외면하는 일도 허다하다. ‘신념’이나 ‘성향’으로 불리는 일들이 실제로는 허상이거나, 착각인 경우도 흔하다. 이를 가장 간단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 스웨덴 연구팀에 의해 발표됐다. 스웨덴 룬트대의 라르스 홀 교수 연구팀은 ‘공공도서관학회지’(플로스원)에 게재한 논문에서 “아주 간단한 트릭만으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허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2010년 스웨덴 총선 직전 162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당시 스웨덴 총선은 보수성향인 보수당과 진보성향인 ‘사회민주당·녹색당 연합’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연구팀은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투표자를 선택했는지를 물은 뒤 ‘증세’‘고용보험’‘환경보호’‘원자력발전’ 등 12개의 정치적 좌우 성향을 가르는 대표적 질문들을 제시했다.

 

연구팀은 이들의 답변 중 몇 가지를 트릭을 이용해 바꾼 뒤 반대편 선거캠프로 데리고 가 “이쪽 정당이 당신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다”고 알려주고,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도록 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92%의 답변자는 자신이 답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의 답변이 실수였다며 일부 답변을 바로잡은 사람도 22%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평소 성향과 반대되는 정책을 왜 골랐는지에 대한 변명을 하기에 바빴다. 실험이 끝난 뒤 조사대상자들에게 다시 투표성향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10%는 보수에서 진보, 또는 진보에서 보수로 투표 성향을 바꿨다.

 

19%는 자신이 기존에 했던 선택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애초부터 투표대상을 고르지 않았다고 답한 18%를 포함하면, 투표 마지막주에 확고한 지지자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47%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같은 인지 능력의 부조화를 ‘선택맹’(選擇盲, choice blindness)이라고 부른다. 이 실험을 진행한 홀 교수는 지난 2010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선택맹을 입증한 바 있다. 120명을 대상으로 2장의 여자 사진을 보여주며 더 매력적인 사진을 선택하게 한 뒤 한쪽 사진을 바꿔서 보여주는 과정을 15번 되풀이한다. 그 중 세 번은 두 장 모두 고르지 않은 사진을 보여줬지만, 실험 참가자들은 한 쪽을 고르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참가자 중 사진이 바뀐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참가자 대부분은 처음에 고르지 않았던 사진을 내놓으며 “왜 골랐냐”라고 물어도 “귀걸이가 마음에 든다”, “짧은 머리가 좋다”고 답변했다. 이들이 처음에 골랐던 사진의 여성은 귀걸이를 하지 않거나, 짧은 머리가 아니었다. 홀 교수는 “뇌가 눈이나 귀, 코, 촉각 등 받아들인 정보들 중에서 일부만 인식하고, 이후에는 자기 유지 본능이 발동한다”면서 “매력을 느낀 여성이 바뀌어도, 자신이 골랐다는 대전제만 기억하고 그 전제 안에서 매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화맹(變化盲, Change blindness)은 선택맹과 더불어 뇌의 착각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다. 하버드대 연구진의 유명한 ‘고릴라 실험’이 있다.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농구영상을 보여주며 특정 학생이 패스한 공의 개수를 세도록 했다.

 

 이 농구영상 속에는 고릴라 탈을 쓴 사람들이 농구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가슴을 치거나 카메라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장면이 모두 9초간 들어있다. 하지만 참가 중 절반은 고릴라가 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공을 세라’는 지시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변화는 시각적으로 받아들이고도, 뇌가 이를 무시한 것이다.

 

고릴라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을 세라’는 임무 없이 다시 영상을 보여주자 모두들 고릴라를 발견했다. 이 실험은 공원의 아이들 숫자를 세도록 하거나, 호수의 보트 숫자를 세도록 한 뒤 고릴라를 삽입하는 식으로 반복됐고 어느 실험에서나 고릴라를 발견하지 못하는 비율은 비슷하게 나타났다.


이같은 실험들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격언이 얼마나 무책임한 믿음인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선택맹과 변화맹은 범죄 수사에도 활용된다. 같은 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정반대로 엇갈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범인이 얼굴이나, 사물의 위치, 자동차 번호판이 바뀌는 사례는 수많은 사건에서 보고된다.

 

심지어 이들의 믿음은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할 정도로 확고하다. 사람이 가장 믿고 있는 ‘뇌’가 사실은 인간의 의지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원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뇌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뇌과학계에서는 현재까지 사람이 알아낸 뇌의 실체가 5%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단정지어 말하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이성에 대한 이상형 등마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보다 겸손하고 신중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교훈이 사람의 몸 속에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 있다는 뜻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