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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KIST 최장연구 'KORFRON'과 최대연구 'KISLON'을 말하다

 

 

 


안영옥 박사 인터뷰, 두 번째 이야기
"높은 압력과 유해가스 속에서 위험했지만 우리는 해야만 했다"

 

1972년 5월 일이다. 국내 기술로 개발된 프레온 냉매(FREON-12) 45 킬로그램이 내압용기에 담겨져 청와대에 도착했다. 시험 제조된 프레온 냉매 등장에 청와대 관계자들은 '과연 에어컨이 작동되긴 할까..'라며 반신반의했다. 작업자가 프레온 냉매를 에어컨에 집어넣고 전원을 연결하자 곧 시원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프레온 냉매 국내개발 2년 만의 일이다.

 

국내 최초 프레온 냉매개발은 한국 불소화학공업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했다. KORFRON으로 명명된 프레온은 울산화학에 기술 이전됐고, 현재의 (주)후성으로 이어져 여러 가지 불소화학제품의 국산화를 성공시켰다. 불소화학제품개발과 공업화 연구사업은 후진 연구원들이 이어받아 KIST에서 가장 긴 45년간의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프레온 냉매개발 중심에는 KIST 연구진들의 땀과 노력이 서려있다. KIST 초창기 멤버이자 KIST 고분자연구실장으로 활동한 안영옥 박사를 직접 만나 ‘KORFRON‘과 가발섬유 'KISLON'개발 과정 에피소드를 들어봤다.

 

“프레온 냉매, 이미 있는 기술이지만 우리는 개발 해야했다”

 

"나라를 위해 귀국했기 때문에 프레온 연구를 꼭 해야겠다 싶었다.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큰 프로젝트였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 훈련된 엔지니어링 팀이 생기면 다른 프로젝트에도 투입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안영옥 박사는 국내 지하자원 중 하나인 형석(fluorspar)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우리 힘으로 화학공정의 연구개발 및 공업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1970년 염화불화탄소인 KORFRON-12 개발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연구팀에는 1930년대 듀폰(Du Pont)에서 불소화학 개발팀에 참여했고, 이후 미국화학회 불소화학분과 회장을 역임한 박달조 박사의 자문이 있었다.

 

프레온 냉매는 이미 1930년 듀폰이 개발에 성공한 바 있는 기술로 1970년대에 개발하기엔 뒤쳐진 기술이었다. 하지만 안영옥 박사와 최형섭 박사(당시 KIST 연구소장), 박달조 박사는 ①화학공정개발 및 공업화를 우리 힘으로 완성하면 장래 많은 화학공업 제품 개발 및 공업화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과 ②불소화학제품의 하나인 프레온은 생활수준 향상에 따라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유용한 화학제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③박달조 박사가 듀폰에서 이 화합물 개발에 참여해 다양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만큼 프로젝트 성공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분석해 연구에 착수했다.

 

 

 

1970년 안 박사팀은 프레온이 우리나라 시장에서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프레온 개발연구를 위한 단위공정별 사전연구와 예비 경제성 검토연구를 진행했다. 1971년에는 프레온 시범공장 설계연구를 완성했고, 1972년에는 월산 5톤 규모의 파일럿 플랜트를 준공했다. 연구개발 및 파일럿 플랜트 건설 비용은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이 1차로 3,200만원을 지원했고 이후 운전 비용으로 1,800만원을 더 지원하는 등 전체 지원된 연구비 약 7천만 원은 당시 일반 연구비의 약 10 배 수준이었다. 1972년 5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파일럿 플랜트 건설 현장을 방문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파일럿 플랜트는 KIST 시험연구동에 세워졌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기사정이 충분하지 못해 정전으로 인한 고압가스의 누출 사고 방지를 위해 별도의 이동식 발전기를 설치해서 사용했다. 상대적으로는 많은 연구비가 투입되었으나 파일럿 플랜트 건설에는 넉넉하지 않았다. 부득이 스테인레스 밸브 등 배관 자재의 상당량은 청계천 상가에 나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 나온 중고 제품을 수리해서 사용했다.

 

한편, CFC 생산에 고순도의 무수불화수소(AHF)가 필요함에 따라 이윤용 박사가 증류 정제연구를 수행하게 됐다. 1975년 무수불화수소 제조공장의 기본설계연구가 수행되어 1977년 연산 700톤 규모의 공장을 울산화학에 건설했다. 그러나 AHF 정제 연구를 위한 시범공장 건설 및 운영에 필요한 연구비가 충분하지 않고 공업화에 필요한 기자재를 국내에서 확보하기 어려워 KIST 연구팀과 한국비철금속 현장 기술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AHF 생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3년경부터 Acid-grade의 형석을 수입해 KIST 공정개발팀(권영수/박건유)에서 울산화학과 공동으로 AHF 제조 및 정제기술을 개발했으며 이를 기초로 1985년에는 AHF 3,300톤/년(55% HF 6,000톤/년)을 생산하는 공장을 건설했다.

 

이후로도 연산 10,000톤의 CFC-11/12와 연산 4,000톤의 HCHC-22 생산 공장의 기본설계를 거쳐 공장을 건설하였고 이를 위해 AHF 플랜트는 몇 번에 걸쳐 확장공사(debottlenecking) 및 증설, 신설을 반복해 1992년도에는 AHF 연산 10,000톤의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다.

 

이외에도 연구팀은 소화용 할론계 제품 개발, 오존층 보호를 위한 CFC 대체품 개발, 불소 생산용 전해조 개발, 반도체 가공 및 리튬전지 전해액 등에 사용되는 불소화학제품의 개발 및 공업화 등 많은 불소계 제품을 개발해서 국산화를 이룩했다.

 

 

 

 

반응기가 터졌다? 새벽에 자다 깨 연구소로 달려간 사연
 
1972년 여름, 파일럿 플랜트가 완공됐다. 박달조 박사의 지도하에 주야에 걸친 연속 운전이 시작되었고 분리, 정제 등의 긴 화학공정을 거쳐 제품 저장 탱크에 프레온 냉매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연구진들은 성공적인 파일럿 플랜트 운전에 기뻐했다.  철야 운전으로 어느 정도 시제품이 만들어 진 후 플랜트 운전을 정지시키고 새벽 5시경에 퇴근하였다. 샤워를 하고 6시가 막 지나 잠이 깊이 들 무렵,  '반응기가 터진 것 같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안 박사는 "프레온은 불화수소산(무색의 자극성 액체로 공기 중에서 발연하며, 유독성으로 피부나 점막을 강하게 침투한다)을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면서 "허겁지겁 뛰어나와 연구실로 갔더니 반응기 주위에 설치한 가스 유출 방지 칸막이 안에 뿌연 연기가 가득해 깜짝 놀랐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연구실로 달려온 안 박사는 연구원들에게 재빨리 환풍기를 가동해 유출가스를 처리하도록 했다. 다행히 반응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파일럿 플랜트 운전을 위해 사용하는 유기물 냉각수는 영하 섭씨 37도로 유지된다. 그런데 퇴근을 하면서 연구진이 충분한 시간동안 냉동기를 추가로 운전하지 못해 저장탱크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저장탱크에 녹아있던 미정제 프레온 중의 염화수소(HCl)가 기화되어 가스로 배출된 것이었다. 염화수소의 위해성은 불화수소보다는 다소 낮으나 여전히 크게 주의가 필요한 화합물이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날은 여름 폭우로 인해 유출된 가스의 대부분이 비에 흡수되어 가스의 확산을 막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후에도 몇 건의 작은 사고가 발생 했지만 이를 잘 극복한 안 박사팀은 파일럿 플랜트 운전을 통해서 훗날 대형공장 설계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상당수 확보할 수 있었다.

 

“인재 보낼 수 없다!” 인력확보 때문에 5개월간 실랑이

 

“우리 회사 연구원을 데리고 가면 어쩌자는 겁니까. 저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파일럿 플랜트에서 시제품이 생산되고 품질이 공업규격에 적합한 것을 확인하고서부터 K-TAC(KIST가 연구개발한 신기술의 기업화추진기구로 74년 9월에 발족)의 윤여경 사장이 중심이 되어 산업체에 기술이전이 시작됐다.

 

기술이전 적격업체로는 불산과 빙정석 생산설비를 갖고 있었던 (주)한국비철금속(現 (주)후성)이 적격업체로 판단됐다.  당시 한국비철금속은 ㈜대한알미늄에 불산과 빙정석을 공급하기 위한 생산설비를 울산에 갖고 있었고, 안영옥 박사와 대학 동기인 남경희 공장장을 비롯한 현장 기술진이 확보돼 있었다. 연산 2000톤 공장 기본설계보고서 작성에는 오박균 연구원이 합류했으며, 상세설계를 비롯한 구매와 건설, 장치 단위의 시운전에는 대림엔지니어링 설계팀이 수행했다. 별도로 공장 건설 기간 중에 산업체 기술요원들이 KIST에 와서 파일럿 플랜트 운전, 품질관리 등 교육을 이수했다.

 

기본설계를 수행한 오박균 연구원의 채용 과정에서 일어난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생산공장의 기본설계를 위해 경력있는 연구원을 공개모집했는데 여기에 지원, 합격한 오박균 연구원의 전 소속 회사에서 KIST에 항의하는 일이 발생했다. KIST가 필요한 인재를 육성해서 활용해야지 산업계 주요인력을  선발해 가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설득하느라 5개월이 지난 후에야 KIST는 오박균 연구원을 채용할 수 있었다.

 

 

 


프레온 12 개발 연구와 병행해서 가발섬유 ‘KISLON’ 까지 개발

 

키슬론(KISLON)이라는 명칭은 'KIST'와 긴섬유의 뜻을 가진 ‘LON'을 합성해서 만든 이름으로 KIST가 개발한 가발 섬유의 고유 상품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경제기획원에서 경제개발을 위한 새로운 기획안을 쓰라는 전갈이 KIST 내려왔다. 어떤 연구개발을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던 중에 윤한식 선임연구원이 가발 원료인 아크릴계 인조섬유를 우리나라기술로 개발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우리나라는 가발수출이 전체 수출액의 9.3%, 약 9천만 불을 상회할 정도로 비중이 컸고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산업이었다.

 

그러나 일반 섬유에 비해 가발 원사는 월등히 고가이었고 원사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했다. 이에 가발 원사를 자급할 수 있다면 국내 부가가치는 더 커질 수 있다는 의견이 모아져 안영옥 박사를 연구책임자로 기획안이 작성됐다.

 

같은 해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앞서 실제로 가발섬유를 한국에서 뽑을 수 있는지 사전 실험이 필요했다. 당시 KIST와 자매결연을 맺은 바텔연구소의 고분자 전문가 라이닝거(Dr. R. Leininger) 박사가 KIST에 파견 나와 있었는데 소형(Bench scale) 습식방사시설을 지원해줬다.

 

여기서 잠깐. 습식방사란?

가발연구에는 습식방사가 필요하다. 습식방사란 화학 섬유를 만드는 방법의 하나로 섬유의 원료가 되는 폴리머를 용제(溶劑)에 녹이고, 이것을 가는 구멍의 노즐을 통하여 응고액 속으로 밀어내어 섬유로 만드는 방법이다. 습식방사가 끝난 후 생성된 토우(TOW, 화학 섬유의 많은 장섬유를 합친 수만~수십만 가닥의 섬유 다발)는 건조, 연신, 후처리 등을 통해 신장력과 탄력성을 부여하면 가발원료(원사)로 완성된다.


아크릴계 섬유는 이 방법으로 제조한다. 반면에 나일론, 폴리에스터와 같은 섬유는 폴리머를 고온에서 용해한 후 노즐을 통하여 직접 공기중에 용융방사하여 섬유를 만든다.

 

해외에서 공중합체 제조에 경험이 많았던 안영옥 박사와 섬유공학 전공의 윤한식 선임연구원이 협력하여 연구를 수행했다. 안 박사팀은 가발용 원사를 구해서 사용하거나, 때로는 이미 완성된 가발 제품을 유기용제 아세톤에 녹여 습식방사로 가발섬유를 뽑아 냈다. 방사된 시제품의 단면, 인모 제품과의 물리화학적 물성 비교 등을 면밀히 검토했고 시제품을 업체 전문가에게 보여서 심사를 받았는데 모두 만족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가발 산업의 중요성을 감안해서 1971년에는 본격적인 파일럿 플랜트 건설을 추진했다.

 

 

프레온 개발에는 박달조 박사의 자문이 큰 힘이 된 반면에 가발 섬유 개발에는 미국 대형 화학회사에서 부사장을 역임한 스텐턴(Dr. G. W. Stanton) 박사의 자문이 큰 힘이 되었다. 스텐턴 박사는 그분의 과거 높은 직위에 비해 겸손하면서도 화학공학은 물론, 토목 , 기계, 전기 등 실무 분야에까지 깊고 폭 넓은 지식을 갖춘,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이어 미국에서 화학공학 학위를 받은 윤 풍(전 삼성코닝정밀유리 사장) 박사가 파일럿 플랜트 설계팀에 합류하여 스탠턴 박사와 함께 일했다. 스탠턴 박사는 특히 파일럿 플랜트의 안전 및 방폭설비에 많은 정보와 자문을 제공했다.

 

연구요원의 충원은 국내에서도 이루어졌다. 아크릴계 고분자의 합성연구로부터 파일럿 플랜트에서의 중합, 습식 방사, 후처리, 품질 관리 등을 위하여 연구원과 운전요원을 신규로 채용했다. 이 중에는 고분자 중합과 습식 방사 등에 이미 현장 경험을 쌓은 이형도(전 삼성전기 부회장), 정경원(삼조화학 사장), 김종수(덕지산업 사장)와 박태기, 이화섭, 우성일, 박 성 연구원 등 우수 전문인력이 다수 포함됐다. 파일럿 플랜트 건설 및 유틸리티 운영에는 프레온 파일럿 플랜트 건설·운영을 담당했던 박건유, 오연국 연구원 등이 참여했다.

 

중합연구는 실험실에서 1 리터의 중합 반응기를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10 리터, 50 리터 중합 반응기를 거쳐 파일럿 플랜트에는 유리라이닝(Glass lining) 이 된 600 리터 중합반응기를 사용하였다. 파일럿 플랜트에서의 건조, 용해, 방사, 후처리 등 모든 설비는 이에 상응하도록 했다. 중합 후 건조되어 유기용제에 다시 용해된 폴리머가 정량 기어펌프로부터 방사노즐(spinnerette), 응고 욕조, 세척기, 건조기, 연신기, 열처리기를 거쳐 제품 권취기(捲取機)에 이르기까지의 공정은 동시성으로 운전(simultaneous operation)이 되어야하므로 정밀한 공정제어 및 운전자의 숙련과 주의가 매우 필요했다.

 

가발(KISLON) 프로젝트는 수출 산업, 부가가치, 시제품의 우수성 등을 인정받아 경제기획원으로부터 4억 원의 연구비를 직접 받는 데 크게 기여했다. 파일럿 플랜트 건설을 포함하여 실제로는 프레온 연구비의 3배에 가까운 약 2억 원을 가발 연구비로 집행했고 나머지는 다른 연구과제의 수행에 사용됐다.  그러나 연구수행을 위한 연구동의 신규 건설, 전기, 스팀, 냉동 시스템, 공기조화 등 모든 인프라 설비(유틸리티)의  자체 확보, 플랜트 전 분야에 걸친 전기 방폭시스템, 시제품의 현장 테스트 등, 개발 연구를 벗어나는데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하는 설비와 이에 따른 업무량이 많았다. 섬유방사용 정밀 스크류 펌프가 너무 고가이어서 국산화를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또 고가인 스텐레스 강판 가격을 절약하고자 적정 두께로 제작하지 못한 폴리머 용해조는  운전 중 용기의 찌그러짐 현상(Buckling)이 발생하기도 했다. 

 

파일럿 플랜트는 1972년에 짓기 시작해 1974년 6월에 완공했으며, 공장 건설 중에 박정희 대통령과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직접 현장을 시찰하고 격려도 했다.

 

안 박사는 “방폭설계를 비롯해 키슬론 공장의 고도 기술인 섬유건조 시설 및 대형 장치기술의 기계 설계, 장치 제작 및 설치에 최선을 다 해준 당시의 KIST 공작실 기술진들의 노고가 컸다”며 그들에게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우리 기술로 개발한 가발 섬유라구요?”

 

KIST 연구진이 원내에서 개발한 가발섬유를 들고 한 공장을 찾았다. 공장 관계자와 대면한 KIST연구진은 원료의 출처는 밝히지 않은 채 “이 원료로 가발을 한번 만들어 봐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고 가발이 완성됐다.

 

KIST연구진 : “가발 원료 어떠셨어요?”
공장 임원 : “매우 좋던데요? 어디서 수입해오신 거에요?”
KIST연구진 : “실은 KIST에서 개발한 국산 원료입니다”
공장 임원 : “그래요!?!?”

 

국내기술로 개발한 가발 원사라고 말하자 공장임원은 이상하리만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우리는 우리 제품의 우수성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미국 가발원료 제조 회사인 Zsa Zsa Gabor 회사에 찾아가 제품을 디자인 테스트했다. 그 결과 내화성, 탄력성, 신축성, 내광성, 내화학성이 외국산에 비해 뒤지지 않았고 스타일이 잘 되며 가볍고 감촉이 좋다는 평과 함께 성능 증명서도 받아왔다.

 

성능 증명서를 받은 후 가발사업을 하던 통상업체에의 기술이전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국내 굴지의 합성섬유 제조사에 2억 원이라는 큰 금액으로 기술이전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기에 공장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 등 해외 시장에서의 가발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이 가발 프로젝트는 불운하게도 산업화에 이르지 못했다.

 

가발원료 프로젝트가 상용화 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안 박사는 이 연구결과가 또 다른 연구개발의 발판이 됐다고 설명한다. 그는 “프레온 연구는 운이 따랐던 프로젝트였으나 가발연구는 그러지 못했다”면서도 “성공의 유무를 떠나 KIST에 다양한 프로젝트가 수행됨으로써 외국으로 나간 한국인 인재들이 다시 모국으로 돌아오고, 또 그들이 대학과 기업으로 진출해 나가는 등 KIST가 중간 정박지 (碇泊地)로서의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안 박사는 프레온 냉매와 가발용 합성인모 제조 뿐 아니라 ▲석유화학 제품인 뷰타디엔 정제 플랜트의 운전 개선연구  ▲자동차용 접착제 개발 ▲화학 시약 제조 ▲석굴암의 과학적 보존 연구 ▲열경화성 아크릴 수지개발 연구 등 다양한 과제를 수행한 바 있다.

 

 

이 기사는 안영옥 박사님 인터뷰와 박건유 KIST 명예연구원님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