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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편안한 길 포기한 과학자, 한국 공업화 획 긋다

 

 

 

[인터뷰]KIST 설립 초기 멤버 ‘안영옥 박사’
귀국 후 KIST 최장 연구분야 불소화학연구 기초마련 및 가발소재원료 개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안영옥 박사는 미국 듀폰연구소에서 부족함 없이 연구하며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오랜 유학생활 덕에 미국 생활에 익숙해졌고, 가정도 꾸리며 행복한 삶을 지낸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 그런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은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한국에 최초로 응용과학연구소가 설립된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최초의 종합연구소로 세워진 KIST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숙원사업으로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였다. 박 전 대통령이 여러 차례 건설현장에 직접 찾아와 점검을 할 정도였으니 내부 연구진 또한 국내 최고가 아니면 안 되었다. 이에 후일 우리나라에서 최장수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최형섭 박사가 외국에서 활동 중인 과학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KIST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귀국에 망설이는 연구원을 설득하였으며 귀국 후의 생활 안정을 약속했다. 바로 이 시기, 1967년 안영옥 박사는 최형섭 박사와 워싱턴에서 첫 대면을 가졌었다.

 

최형섭 박사와의 만남에서 귀국을 결정했지만 솔직히 한국에 돌아가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의 지식과 배움이 모국에 도움이 된다면 돌아가자'라는 마음이 앞섰다. 부인도 다행히 그를 적극 지지했다.

 

"사실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정한 동기중 하나가 듀폰연구소에서 만난 한 동료 덕분이었지요. 당시 1960년대의 듀폰 중앙연구소는 미국의 3대 연구소중 하나였고 한 연구실에 박사 2명이 한 방을 쓰는 연구 시스템이었습니다. 운이 좋아서 고분자합성을 잘 하는 외국박사와 파트너가 되었는데 당시 나는 30대이고 그 사람은 50대였습니다. 정말 현명하고 똑똑한 분이셨어요. 나는 나와 같이 연구생활을 하는 동료를 보고 20년 후의 자화상을 상상할 수 있었고 이 생활보다는 조국에 돌아가 더 큰 일을 해 보고 싶어 이런 믿음으로 귀국을 결정했지요."

 

그를 포함한 18명의 책임연구원급 과학자들이 과학기술 불모지인 척박한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한국은 그야말로 과학기술 황무지. 18명의 박사를 포함한 300여명의 KIST인들은 주변 환경에 굴하지 않고 ‘한국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지로 연구에 전념했다.

 

그 결과 안 박사팀은 1970년 초 미국 불소화학의 원로셨던 박달조 박사를 고문으로 모시고 프레온 냉매 생산을 위한 기초 연구부터 파일럿 플랜트,  공장건설까지 완성해 한국 불소화학공업의 기초를 닦는데 성공하였다. 이 연구 결과는 산업은행의 출자로 시작한 울산화학에 이전되었으며 현재의 ㈜후성으로 이어져 많은 불소화학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불소화학제품개발 및 공업화 연구사업은 이후에도 후배연구원들이 중단 없이 수행하여 KIST 역사상 유일하게 45년의 연구 역사를 갖게 되었다.  2010년 한국공학한림원과 지식경제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기술과 주역’에 이 연구 사업 및 연구책임자 3인(안영옥, 박건유, 권영수)이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 박사는 당시 최대 수출 품목이었던 가발 소재 국산화를 위하여 시험공장(파일럿 플랜트)을 건설하고 시제품 생산에도 성공하였다. 연구결과(Know-how)는 1976년에 1억 6천만 원의 기술료를 받고 산업체에 이전하였다. 당시 연구프로젝트 1건당 연간 연구비 규모가 500만원 전후인 경우가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기술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KIST 설립단계의 산 증인이자 화학공정 개발을 통한 한국공업화에 커다란 기여를 한 안영옥 박사. 그를 직접 만나 KIST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았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유학까지…미국 굴지기업 노하우 배우다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낸 안영옥 박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 화공과를 선택했다. 입학해 배운 수업들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학업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그 시기는 한국전쟁 전후. 공부할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때였다. 그러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Q. 한국전쟁으로 정신이 없었을 때인데 미국에는 어떤 계기로 가시게 되었습니까?

 

A. 전쟁이 끝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2학년이 되어 ‘이제 공부를 좀 시작할 수 있을까’ 싶을 즈음 샌프란시스코의 미군 장교부인회에서 이공계 학생을 지원하겠다는 희소식이 들려왔지요. 일을 하면서 공부도 병행할 수 있다는 좋은 조건이었기에 300~400여명이나 되는 많은 학생들이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본래 계획은 10명만 선발할 예정이었지만 총 18명이 선정돼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KIST 초창기 멤버인 김훈철 박사도 함께 선발된 분입니다.


Q. 미국생활은 어떠했습니까?

 

A. 서울대 화공과에서 3학년 과정을 마친 상태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편입하게 되었는데 '한국전쟁으로 공부를 제대로 못했으니 3학년부터 다시 다니는 것이 좋겠다'는 학교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못했던 공부를 원 없이 하자는 마음으로 3학년 과정을 재수하는데 동의하였고, 버클리를 졸업한 후에는 아이오와 주립 대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했습니다.


Q. 졸업 후 듀폰에 들어가셨지요? 어떤 연구를 수행하셨습니까?

 

A. 사실 처음부터 듀폰연구소에 들어 간 것은 아니고,.. 당시 미국 기업과 연구소 등은 외국인 인력 채용에 굉장히 신중했기에 ‘미국 시민만 채용 가능’이라는 조건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러나 운이 좋게 유니온카바이드사에서 온 한국전 참전용사를 만나 석사학위 취득 후에 유니온카바이드사 연구소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게 좋겠다’는 가족의 권유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박사 학위 취득 후 듀폰연구소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당시 듀폰은 총 3천여 명의 직원이 근무했고, 박사 인력만도 1300여명으로 그 중 화학, 화학공학 관련 인력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는 이론과 기초실험 중심으로 수업을 들었었는데 듀폰에서 일하면서 산업적 실용성이 큰 고분자 합성기술 등을 배울 기회가 있었고 한국에 돌아 와서도 이 때 배운 지식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구와 선진국 시찰까지…만능이여야 했던 KIST연구진

 

 

 

듀폰연구소에서 4년간 일을 하며 다양한 산업기술을 몸에 익힌 어느 날. 한국에 최초로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KIST가 설립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국하는 연구진에게 많은 혜택이 제공된다고 했지만 미국생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안 박사는 한국행을 택했다.


Q. 귀국을 선택하기까지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A. 한국에 연구소가 생긴다는 소문을 들었고, 1967년 가을 워싱턴에서 최형섭 박사를 만났지요. 최 박사님과의 미팅 후 귀국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이미 미국에 안정된 가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실 좀 고민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 때 집사람이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돌아갑시다”라며 적극적으로 지원해 1969년 초에 귀국길에 올랐지요.

 

도착한 한국은 생각보다 여건이 열악했어요. 당시 한국은 대학에서 박사인력을 거의 배출하지 못했고, 실험실 설비도 매우 열악한 형편이어서 논문도 제대로 나오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따라서 KIST의 과학자들은 어떤 연구부터 시작해야할 지 한동안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KIST가 바텔연구소(미국에 있는 이공계 분야 최대 계약 연구개발기관)를 벤치마킹한 계약연구소로 설립됐기에 사실 실장들이 밖에 나가서 산업계 일을 따와야 했어요. 하지만 기업들도 연구개발이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기에 연구 프로젝트 따오기가 무척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Q. 과학기술 기반이 거의 없었던 한국이었기에 연구 환경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A. KIST초창기에는 1실 1박사였지요. 듀폰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말 있기 어려운 시스템이었어요. 하지만 KIST는 연구뿐 아니라 외국에서 활동 중인 인재들을 국내로 불러들이는 중간 정박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들이 KIST에서의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대학과 기업 등으로 진출해 나가면서 국내 연구환경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Q.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KIST에서 프레온 냉매생산의 파일럿 플랜트 건설부터 공장건설까지 한국 불소화학공업의 기반을 닦았고, 가발재료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셨습니다. 불소화학제품 연구개발과 공업화를 추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불소화학제품의 개발과 관련하여 과학기술처가 지원한 전체 연구비는 약 7천만 원으로 당시 일반 연구비의 10~15배 수준이었지요. 이처럼 많은 연구비를 투입하게 된 것은 앞으로 중화학공업에 대비하여 화학공정의 개발로부터 공업화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우리의 역량을 키우고 동시에 산업 및 생활 향상에 따라 프레온가스의 수요가 크게 늘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부존자원인 형석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국내 정련기술과 설비가 없어 이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파일럿 플랜트 건설 현장을 방문하고 격려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던 프로젝트였습니다. 불소화학제품 개발 및 공업화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연구팀에는 1930년대에 듀폰에서 불소화학 개발팀에 참여했고 이후 미국화학회 불소화학분과 회장을 역임한 박달조 박사의 자문이 있었으며 증류분리공정 분야에 이윤용 박사, 화학장치설계 분야에 이규완 박사, 그리고 파일럿 플랜트 건설에는 화학공장 근무경력이 있었던 박건유, 민경완 연구원과 손현명 연구원 등이 참여했어요. 초기 운전 요원에는 PVC 공장 경력의 오연국 기사, 영남화학(비료) 정비분야 경력이 있는 권번일 기사, 박 성, 전주석, 이재우 기사 등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Q. 연구 외의 일도 하셨다고요?

 

A. 1973년 즈음 IBRD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일본과 유럽 등에 시찰단이 보내졌어요. 당시 본인을 포함하여 기계분야의 (고)남준우 박사 등 4명이 독일, 불란서, 영국, 스웨덴 등을 한 달간 다니며 어떤 기술과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 돌아보고 여러 가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보고서들은 국가개발계획 수립에 많은 도움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Q. 외부에서 보는 KIST는 어떠한지. KIST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A. 과거 우리가 연구했던 시절은 KIST의 연구 시스템이나 지원 시스템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었지만 뚝심있게 대형 프로젝트를 해낸 것에 대하여는 한편으로 자부심도 느낍니다. 40년이 지난 오늘날의 KIST는 과거와 달리 연구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제는 KIST가 자기 위치를 잘 정해야할 것입니다. 기초연구는 대학에서, 응용연구는 산업계가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KIST는 중간에서 큰 힘을 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인 지 잘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겠지요.

 

예를 들어 최근 KIST가 그래핀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좋은 소식입니다. 혼자 무언가 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대학 및 기업과 정보를 나누고 협력하면서 역량을 크게 키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세계적으로 제일 잘 할 수 있는 과제들에 힘을 모아서 많은 결실이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는 안영옥 박사님 인터뷰와 박건유 KIST 명예연구원님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