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iracle KIST

박원희 전 원장, “우리는 과학기술 공급자…연구수요가 무엇인지 고민하라”

 

 

‘궁하면 통한다’ 했다.
하지만 1950년대는 궁한 것 천지였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일상이 곧 부재(不在)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부족한 것은 의식주였지만, 우리 민족이 더욱 궁하게 생각한 것은 교육이었다. 전쟁 중에 피난을 가면서도 산에 천막을 치고 임시 학교를 열어 수업을 했고, 건물도 없는 학교가 신입생을 뽑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수험생이던 박원희 전 KIST 원장에게도 학업은 중요했다. 신문을 유심히 보다가 수업이 열리는 시간과 장소를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했고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입시를 치러 신입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고 여전히 산에서 천막치고 공부하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새로운 공부가 좋았다. 3학년 때 전쟁은 끝났고, 미군이 사용하던 예전 교사로 돌아왔지만 교육여건은 좋아지지 않아 휴학한 날이 강의한 날보다 많았다. 무엇보다 교수가 너무 부족하던 시기였다.

부족한 학업을 채우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그에게 학교 측이 제의를 해왔다. 미국의 원조로 유학을 다녀올 수 있으니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도 제대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서 대학원 졸업 후 미국유학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55년 가을, 공부를 끝까지 한 번 해보자는 굳은 각오로 미국 미네소타대학교(University of Minnesota) 대학원으로 떠났다. 인터넷도 없고 미국에 다녀온 사람도 주변에 없던 시절, 그는 낯선 땅에서 오롯이 이방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지만 화장실에서 처음으로 좌변기를 보고 사용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게 4년 반, 지도교수가 과목을 지정해주면 학부 강의도 모조리 들어가며 몸과 마음이 모두 고생스러웠지만 원 없이 공부했다.

귀국 후, 떠나기 전만 해도 박사만 되면 모든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돌아와 보니 그렇지 않았다. 서울대학교의 여건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고가의 장비가 필요 없는 간단한 실험이나 이론적 연구가 전부였다. 학부 강의는 어렵지 않았지만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는 것은 힘들었다.

1972년, KIST에서 채용 제의가 들어왔을 때 그는 유학을 보내준 은사에게 사죄하고 KIST를 택했다. 여러 가지 기회를 준 모교에는 미안했지만,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 연구자로서의 장래를 생각하니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KIST에 와서 했던 연구들도 지금 생각해보면 연구는 아니었지. 국산화 기술개발이 전부였으니까 연구계획서에 기대효과 부분은 늘 ‘수입대체 100만달러’라고 적었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연구들과는 내용이 달랐어. 기초적인 학문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외국 것을 만들 수 있을까 방법을 알아내거나 특정산업이 발전하는데 애로기술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어. 그래도 설비나 연구기기가 당시 최신식으로 갖춰져 있어서 실험도 원 없이 했고, 당시의 기술 수요를 반영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 젊은 여공들이 어렵게 일해서 벌은 외화를 지키기 위한 수입대체 연구였으니 그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 않아?”

당시 국내 연구자들이 대개 그렇듯 박원희 원장도 KIST에 와서 연구자로서의 욕심을 채우진 못했다. 당장 필요한 기술개발에 매진했고, KIST가 신생기관이었기 때문에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행정·경영 부분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KIST가 자리매김하는데 자기 몫을 했다는 보람과 KIST가 현재 우리나라가 발전하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에 더 이상의 후회는 없다. 

그는 “당시 지도자가 선진화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고 국민들 모두가 적극적으로 열심히 노력했다”며 “지나고 보니 훌륭한 민족, 훌륭한 국가였다”고 말했다.


KIST 퇴임 후 호서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그는 본인의 신조에 따라 70세에 사회생활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그때가 되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옳다는 판단 아래 젊은 시절부터 계획했던 일이다. 꼿꼿한 자세와 또렷한 목소리에 KIST와 KAIST의 합병과 분리의 풍파 속에 연구원들을 지키기 위해 뛰어다니던 맹장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의 표정은 편안했다. 운동과 독서, 친교활동 등을 하며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를 찾아가 추억과 지혜를 들어봤다.

당시에는 대학교에서 연구소 행이 당연했겠지만 요즘은 흔치 않다.

“1970년대엔 학교의 연구여건이 굉장히 열악해서 KIST에 간다는 것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후에 신군부가 들어서며 KAIST와 합병하게 되었고 출연연에 대한 배척이 심해졌다. 내부적으로 분쟁도 많고, 전 직원들의 사기가 굉장히 떨어져 연구 성과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주변에서 ‘대학에 있지 왜 여기 와서 고생하느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합병 당시 고생이 많았겠다.

“분야가 같다고 모두 통합을 해버리니 내부에서 조율이 안 됐다. 교수들이 보기에는 논문을 안 쓰는 사람들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말이 안 됐고, 연구원들 생각엔 공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들이 기술 개발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소모전이 계속되니 비효율적이라 생각이 들었고 통합 후에도 이원적인 운영을 해왔다. 당시 KAIST 총장이 전체 원장을 하고, 나는 연구본부장을 하며 KIST를 운영했다. 결국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정식으로 법 개정을 통해 분리하게 됐다. 양쪽 모두 만족했다.”


KIST에 와서 한 연구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당시 연탄가스 중독이 사회적 문제였다. 그걸 KIST에서 해결하라는 주문이 떨어졌고 당연히 화학공학 부서로 넘어왔다. 하지만 구공탄이 타면 가스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없앨 순 없으니 발생량을 줄이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가스가 기후의 영향을 받으니 날씨에 따라 경고지수를 만들자는 얘기도 나왔고, 새로운 성분을 집어넣거나 연소통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것이 그때 우리나라의 연구 수요였다. 우리는 공급하는 사람들이니까 열심히 만들어내야 했다.”


KIST에서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

“KIST에서 연구 자체보다는 연구를 관리하는 보직을 많이 했다. 신군부 들어온 후 보직자들이 모두 경질되면서 부서장이던 내가 연구본부장이 되었다. 덕분에 행정을 일찍 맡게 되었는데 가장 보람된 일은 KAIST와의 분리를 성공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덕분에 분리 후 초대 원장도 하게 됐다.

또 하나의 보람은 연구원에서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는 학연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연구소에는 젊은 사람이 필요한데 학위를 줄 수가 없다. 그래서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경희대 등과 협정을 맺고, 강의는 거기서 받고, 연구는 KIST에 와서 진행해 논문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학생들의 정원은 별도로 부여받게 함으로써 대학 측에서 반가운 제도였다. KIST로서는 젊은 친구들의 아이디어도 접하며 연구를 돕게 할 수 있었고, 학생들로서는 현장경험을 쌓으며 논문과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현재 학연프로그램이 많이 생겼는데 그 시초는 KIST였다.”


행정을 맡으며 출연연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았겠다.

“과학기술도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국가 연구개발의 구성은 기초기술에서 실험기술, 응용기술까지 모두 다 필요하다. 다만 나라의 발전단계에 따라 비중이 다를 뿐이다. 선진국은 상대적으로 기초기술이 많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응용·실용기술의 비중이 크다. 하지만 최근에는 응용기술은 대부분 산업에서 자체적으로 하고 있다.

국가 연구개발의 구성 안에서 출연연의 역할에 대해 여전히 말이 많다. 기초 쪽은 대학이 하고 있고, 기술은 산업에서 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시작은, 기초에서 연구해 놓은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다듬어서 ‘경제성’을 부여, 실용화하는 것이다. 과학하고 기술을 연결시키는데 있는 간극을 출연연구소에서 메워줘야 한다. 어느 나라든 국가연구개발에서 취약점은 거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연구소들이 있는 거다.기초연구기관하고 산업계하고를 연결시키는 하나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출연연구소가 해야 하는 일이다.”


KIST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과연 우리가 무슨 연구를 해야 하느냐’는 연구원에 있을 때부터 가장 큰 고민이었다. 세상이 계속 바뀌고 있는데 연구자들은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이미 세상이 바뀌고 난 후에 시작하면 늦기 때문이다. 원장 재직 당시 산업계가 성장하며 자체 산업기술개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원천과 기초 쪽을 보게 되었다. 산업계 수준과 제품의 질이 높아졌기 때문에 출연연에서 산업기술을 개발하는 시대는 지나고 있었다. 산업계에서 생각 못했던 연구를 제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 KIST는 다른 출연연들과는 달리 종합연구소의 장점을 이용하는 게 마땅했다. 현재 KIST가 강조하는 두 가지 키워드 ‘종합연구소’와 ‘원천기술’은 장점인 동시에 생존전략이다.”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첫째도 연구, 둘째도 연구다. 연구소라는 것은 좋은 연구 성과를 많이 내는 것이 전부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KIST는 주요 연구 분야가 모두 있는 종합연구소니까 서로 협력해서 다른 연구소에서 못하는 연구, 국가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 성과를 냈으면 좋겠다. 퇴임한지 15년이 넘었지만 신문에 KIST 연구 성과를 보면 참 기분이 좋다. 나 뿐 아니라 KIST에 몸담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 것이다. KIST에서 훌륭한 연구 성과가 나오는 것만이 나의 희망이고 바람이다.”


그 외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걱정이 되요. 일반 국민들이 이공계통에 무관심한 것도 섭섭하고요. 젊은 사람들에게 경제·문화·사회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을 못하면 창피하게 생각하는데 고등학교 수준의 과학기술은 몰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즐겨 쓰면 기본 원리를 알고 있어도 좋지 않겠어요? 일반국민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많이 알아야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보다 실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