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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창의포럼 : 이주헌 미술평론가(09.19)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알기 위해 미술관련 책도 읽고, 작품과 친해지려고 미술관을 기웃거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미술이다. 어떻게 기성품 변기, 자신의 대변을 넣은 캔(can)이 작품이 되는지 모르겠다.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8,688만달러에 팔린 ‘오렌지, 레드, 옐로우’(마크 로드코)는 내 눈에는 그냥 3가지 색일 뿐인데 그렇게 고가에 팔릴 정도의 뛰어난 예술작품인지 더더욱 알 수 없다. 미술평론가이자 서울미술관 관장인 이주헌님의 특강을 들으면 이런 의문이 과연 풀릴 수 있을까?

 

눈의 한계와 미술

 

이주헌 관장이 우리에게 먼저 보여준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도형이었다. 우리 눈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착시현상의 예를 들면서 눈이라는 인간의 감각기관이 지닌 한계를 설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시각의 한계가 미술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2차원의 평면임에도 잘 그린 그림은 3차원의 공간감, 입체감,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그림 속에 꽃잎이 하늘거리는 것처럼 느낀다. 실제 만져보면 2차원 평면에 불과하지만 착시현상 때문에 3차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미술은 인간의 시각적 한계가 가져다준 축복이라고 했다. 내가 본 여인은 오른쪽으로 춤을 추며 도는데 반대로 왼쪽으로 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른쪽으로 돈다고 보는 사람은 우뇌가 왼쪽으로 돈다고 보는 사람은 좌뇌가 활성화 되고 있는 상태라고 추정했다. 눈의 착시현상과 논리‧분석의 좌뇌 , 직관‧이미지의 우뇌 2개, 즉 두개의 뇌를 가진 탓에 사람마다 사물을 다르게 본다. 시각에 의존한 예술인 미술에는 정답이 없다. 내가 남과 다르게 보고 진정 '나다워 지는 Original‘이 예술에서의 창의성이다.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미술은 사기다

 

관객이 피카소를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미술이 뭡니까” 피카소가 답했다. “미술은 돈입니다.” 최근 10년간 세계미술품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로 팔린 작품 10개 중에 피카소의 작품이 3편이 올라있으니 “미술은 돈이다”라는 말도 일리 있는 답이다. 피카소가 말한 ‘미술이 돈’이라는 진정한 의미는 위대한 미술작품은 국경과 인종, 문화를 초월한 감동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결국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에게 물었다. “예술은 무엇입니까”. 백남준 선생이 말했다. “예술은 사기입니다.” 예술은 고정관념의 울타리에 갇혀있는 사람,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사기처럼 보인다. 백남준 선생의 작품 ‘부처’는 TV를 시청하고 있는 부처의 모습이다. TV위에 비디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촬영-송출- 시청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작품은 불교의 ‘윤회’와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의 창의성 밑바탕에는 한국 사람의 융통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몰입과 놀이

 

몰입, ‘일을 놀이처럼 즐겨라’라는 말은 과거 창의포럼에서도 많이 등장한 이야기지만 이주헌 관장은 예술의 관점에서 색다른 접근을 했다. 예술에서 몰입은 나를 잊는 무아지경의 경지라 설명했다. 나를 잊는 것은 주위를 의식하는 강박을 벗어나서 나의 기원 'Origin'으로 돌아가서 진정한 나의 꿈, 나의 욕망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몰입을 잘하는 사람은 노는 사람이다. 한국 사람의 놀이감성을 잘 반영한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몰입을 통한 예술적 창조는 놀이에 기반을 둘 때 더 폭발력을 지닌다. 아예 사무공간을 놀이터처럼 만들고 직원이 놀이처럼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회사도 있다. 제대로 노는 것은 실패를 즐기고, 그 경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한‧일 월드컵 4강신화의 주역 히딩크 감독을 인용했다. 자전거 안장과 핸들로 만든 피카소의 ‘황소머리’는 몰입을 통해 발견했고, 투우라는 피카소의 'Origin'으로 돌아가서 창조한 작품이라 했다. 피카소는 황소머리를 만들기 위해 자전거 안장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중고 자전거를 보는 순간 황소머리가 떠올랐다고 한다. 피카소는 말했다.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한다.”

 

파괴와 전복

 

창조를 위해서는 고정화하려는 의식을 틀을 깨야한다. 파괴의 결이 창조의 결이다. 마크 퀸의 ‘셀프’는 조각작품은 돌이나 쇠 같은 고체재료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전복시킨 작가 본인의 피, 액체로 만든 작품이다. 작품을 자화상이라 하지 않고 셀프라고 명명한 것도 자신의 피로 만들었기에 작품자체가 작가 자신인 것이다. 만조니의 ‘세계의 대좌’는 조각을 올려놓는 받침대인 대좌를 땅위에 거꾸로 설치한 작품이다. 거꾸로 놓음으로써 대좌가 지구를 받치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파괴와 전복은 전통과 이념, 도그마에 대한 거부이자 도전이다. 획일화된 일상에 파괴와 전복이 없으면 창조는 생성되지 않는다.

 

 

이주헌 관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미술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이라고.

 

“미술을 모른다고 감상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지성은 좌뇌의 영역이고 감상은 우뇌의 영역이다. 미술은 느낀 만큼 보이는 것이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느끼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술가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감상자에게도 느껴보라고 하는 것이 그림이다.”

 

청명한 가을이다. 우리의 우뇌를 살찌우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미술관 나들이를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