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IST Talk/사내직원기자

프러포즈는 Nature로 하자


영화 'Before Sunrise'에서 스치듯 흘렀지만 강렬했던 줄리 델피의 대사가 아직도 생각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이 좀 더 사랑 받기 위한 것 아니야?"

 
*

해외출장에서 저녁 식사 중 한 필리핀 학생에게 물었다.

"넌 연구가 좋아?"
"응.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좋아. 누가 원자단위를 볼 수 있겠어? 너는 어때?"
"나도 연구가 좋아. 물론 내가 잘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난 내가 좋아서 해.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 "


*

기다림이 필요한 실험이 많다. 늦은 저녁, 그렇게 실험실에 몇 명이 모여서 능숙하게 기다림의 행위를 하고 있었다.

"결혼은 언제 할 계획이에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조금은 안정된 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렴 그게 참 중요하죠.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줄 수 있는 거라곤 멋진 데이터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럼 이건 어때요? 정말 열심히 해서 멋진 결과를 얻고 그걸로 Nature를 쓰는 거에요. 그리고 2저자로 그 사람을 넣는 거죠. 연구에 기여를 한 사람이 저자가 되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내가 이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는 거죠. 열심을 내는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됐고 좌절에서 회생시키는 용기를 줬고.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이 적힌 그 논문을 들고 가서 프러포즈를 하는 거죠."
"흐흐. 넌 그렇게 해라."
 

*

줄리 델피의 말을 쉽게 부인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좀 더 너그럽게 그녀의 말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말인 즉, 대사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사랑을 주는 대상은 타인일 수도, 나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는, 내가 나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해야 하며 타인도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늘 간절했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하여, 시작부터 좋아서 가게 된 것일지도 모르고 크고 거대한 것이 나를 굴리는 대로 굴러가다 보니 좋아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동기야 어찌됐든, 삶이 시간의 무게만큼 무거워지면서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게 만족스러울까 하는 고민이 수반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앞으로 더욱 이 외로운 길이 주구장창 계속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살면서 코딱지만큼의 새로운 지식확장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유치한 예를 들자면, 멋진 노래를 하나 만들었다면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반대로 그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을 텐데, 연구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Nature 2저자로 넣어준다 한들(물론 말도 되지 않는 농담입니다만) 그만한 사랑의 표현이 될 것이며 그만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원하고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은 희미함이 두려울 때가 있다.

회식자리에서 연세가 있으신 박사님, 교수님들께서는 다가올 어린 세대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다. 연구를 사랑하시고 후배를 사랑하시는 분들이었다. 당신들의 남은 기간 동안의 연구보다 후배들의 장차 닥칠 연구환경을 걱정하셨고, 학문분야를 걱정하셨다. 그런 말씀을 들을 때면 거기에 또 다른 종류의 답이 있을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태양이 작렬하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른다. 올 해 여름은 더더욱 뜨거운데, 사랑을 받기 위해서건 주기 위해서건 간에 우선은 가보기로 한다. 옆의 친구 녀석은 Nature로 프러포즈할 생각이라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며 낄낄댄다.



'KIST Talk > 사내직원기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냉면 좋아하시나요  (5) 2011.08.29
현재를 살고 계십니까  (0) 2011.08.29
“고전, 내 인생을 바꾸는 모멘텀”  (0) 2011.07.26
마리 퀴리  (1) 2011.07.26
Episode for "KKuang-KKuang Namu"  (0) 2011.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