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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현재를 살고 계십니까


#1
‘지금’ 이 순간은 말 그대로 언제나 순간이 되어 내 삶을 스친다. 같은 간격으로 같은 양으로 불어왔다 작별하는 ‘지금’의 시간이 아쉬워서 돌아가는 초침으로 ‘지금’이 흘러가는 속도를 느껴보려 가만히 앉았으면, ‘지금’은 순간이 되고 순간은 짧은 잔향을 남기며 사라진다. 매 순간 이렇게 스쳐가는 찰나의 연속은 부지런하고, 그것은 나의 이 단단한 나이를 어찌 새겼는지, 큰 괴리와 아득함이 몰려왔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몇 천, 몇 만의 ‘지금’이 나를 결정할진대.

#2
내가 마주하는 세라믹 재료는 호흡이 차분하고 느리다. 어떤 경우는 단 한 번의 호흡이 안정되기까지 하루가 걸리기도 하고 과한 경우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인내가 요구되는 과정의 반복은 현재보다 미래를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비단 세라믹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것이, 대부분의 연구가 해 단위로 구체화되며 그것도 모자라 2~3년을 한데 묶은 단계 단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안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마 젊은 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 너무도 많은 과정과 너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에, 현재는 미지근했다. 나는 현재를 살고 싶은데 미래를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 끝을 생각하며 순진하게 돌진할 만큼 나는 그리 인내심이 충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현재를 살 때에만 열정이 깃들 수 있고 행복은 현재를 사는 삶만이 담보한다는 생각은 수정할 수 없었다. 아니, 수정하기 싫었다. 푸슈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현재를 참고 견디면 행복한 미래가 올 것이니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했다. 그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다고 울컥하는 젊은 날이었다.

#3
한때, 나에게는 유리에 부서지는 빛은 표정을, 단어 하나하나는 저 나름의 사연을 가졌다. 그런 나에게 사람들은 무섭도록 강했으며 결코 쉽지 않아야만 했을 인연을 쉽게 이야기했다. 왜 쉽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마치 인연이란 것이 모두의 마음에 한처럼 맺혀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열렸던 고은 시인의 강연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강연에서 선생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며, 비유하자면 어떤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좌와 우에서 쏜 두 화살의 화살촉이 공중에서 맞부딪히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은 엄청난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서로가 마주하는 것이다. 그 말을 따라 인생을 생각하자면, 인생은 마치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들과 같은 빛깔로 모든 순간 빛날 수밖에 없었다.

화살촉끼리 마주하는 그 한 점은 구름까지 넉넉히 안는 넓은 하늘에서의 한 점일 것이며, 옆을 지나는 산새의 날갯짓으로도 쉽게 어긋날 수 있는 한 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나에게 건네는 지금의 물 한 잔과, 나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지금의 실험결과와, 공중의 공기를 흔드는 나와 당신의 대화는 사실 대단한 것들이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인생이 대단하다면, 지금 나의 삶이 대단하다면, 스치는 이 순간이 대단하다면. 어린 나에게 잡혀 밤이 되도록 방충망에 매달려 쓸쓸히 밖을 내다보던 잠자리의 눈에서부터,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훔치던 그 날 밤의 내음과, 지금 전화로 건너오는 타인의 목소리까지도 대단하다면. 경이로운 사건들과 감동스러운 결말이라는 버거운 조건들을 굳이 만족하지 않아도, 지금 내가 맞닥뜨리는 일들과 인연이라면 인연일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이 실상은 공중에서 만나는 화살촉과 같은 경이로운 일이라면 이 얼마나 멋진 삶인가, 부러운 생각이 일었다. 

 그렇다. 현재를 산다는 건 늘 삶의 화두였다. 순간의 흐름조차 무겁게 느끼고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일상을 꿈꾸는 나는, 불확실하나 나의 최선이 더해질수록 희망의 영역은 넓어질 것이라는 굉장히 무책임하게 정의된 미래를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힘들었다. 그래서 간신히 내린 결론이다. 이 순간은 엄청난 확률을 뚫고 나와 마주하는 것들의 집합이어서 실상 나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살고 있다고. 바보 같은 이런 희망은 때때로 나를 관대한 사람으로, 열정 넘치는 사람으로, 밝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삶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고 인내심 많은 사람으로 자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굳이 빛나지 않더라도 스치듯 흐르는 순간순간은 이미 충분히 소중함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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