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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유홍준 교수 창의포럼(2.22)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로 잘 알려진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지난 22일 KIST를 찾았다. 강연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자녀와 함께 들으러 온 사람들도 있었고, 좌석이 부족해 서 있는 사람도 생겨났다. 과연 그의 강연 또한 베스트셀러였다. 최근 ‘무릎팍 도사’, ‘1박 2일’ 등 인기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한국 문화를 재미있게 설명하며 ‘국민 문화해설사’ 호칭을 얻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는 유 교수는 “이제 ‘놀러와’에서도 섭외 요청이 온다”며 웃었다.  

한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최근 LA카운티뮤지엄은 한국미술 섹션을 지하에서 지상으로 확장 전시했다. 이는 한국과 한국미술의 높아진 위상을 시사한다. 사실 한국인들은 규모에 대한 열등감을 늘 가지고 있다. 경복궁을 자금성의 ‘뒷간’에 불과하다며 폄하하는 것도 이런 열등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라이샤우어 하버드 교수 등이 집필한 책 <East Asia>에 따르면 한국이 '작은 나라'라는 인식은 단지 중국과 붙어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라이샤우어 교수는 역사상 동아시아에서 한 역할로 보면 한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합친 영국 전체 정도에 비견될 만하다고 했다. 경복궁 또한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자금성보다 훨씬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역사와 문화의 뿌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깊고 길고 굵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이 앞으로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에서 담당할 역할 또한 점점 커지고 있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한 한국을 더 이상 스스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 고고학 지도를 바꾼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유 교수의 강연은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원삼국 및 삼국시대의 흐름을 따라 시대별로 대표적인 유물·유적을 살펴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는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하나로 모두 설명된다고 한다. 한국 문화는 석굴암 하나로 모두 설명된다는 말이 생각나는 지점으로, 각각 시대와 문화의 정수(精髓)인 것이다.

이 주먹도끼는 세계 고고학 지도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 1978년 동두천에서 복무하던 한 미국 하사가 한탄강 유역에서 발견한 이것은 구석기 중 가장 지능적인 '아쉴리안' 주먹도끼로, 동아시아에는 아쉴리안 주먹도끼 전통이 없다는 당시의 학설을 뒤엎은 계기가 되었다.  

빗살무늬 토기와 융합학문의 중요성

신석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인류의 삶에는 농경이라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농경으로 생산된 잉여작물을 보관하고 조리하기 위해 토기가 발명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빗살무늬 토기다. 그런데 빗살무늬 토기에 왜 하필 '빗살무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해 왔다. 그간 빗살무늬의 존재는 미(美), 즉 장식적 차원에서 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몇 년 전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에 진학해 유 교수의 강의를 듣던 한 전직 피부과 의사는 빗살무늬에 대해 마치 사람의 지문처럼 토기가 쉽게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학문이 마주치는 지점들이 바로 새로운 발견과 아이디어의 실마리라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무덤으로 보는 삼국시대

철기를 지난 한반도는 원(proto)삼국시대에 접어들었다. 유 교수는 이 시대를 '무덤'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했다. 예로부터 장례 풍습보다 보수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장례 풍습의 차이와 변화를 보면 문화의 차이와 변화가 보인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무덤은 고분벽화 풍습, 백제의 무덤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며, 신라의 무덤은 봉분 형태다. 불교 미술의 시대가 오기 전인 이 시기에는 고분미술이 꽃을 피웠다. 수렵도 등 고구려 고분벽화는 디테일과 유머감각이 살아있는 생동감 있는 명작이고, 백제와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각종 공예품들은 현대의 명품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련되고 정교하다.  

儉而不陋 華而不侈

삼국 중에서도 백제는 단연 세련된 문화로 이름 높다. 중국의 발달된 문화를 거침없이 수용한 개방성과, 기와 장인을 ‘와박사(瓦博士)’라고 부를 정도로 높았던 기술자에 대한 대우가 이루어낸 결과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는 문화 발전의 필수 덕목일 것이다.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미학을 ‘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표현한 바 있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이는 백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감을 대표할 만한 명문이라고 유 교수는 평한다.

몸도, 마음도, 일도, 삶도 이와 같이만 꾸려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