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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독일사람vs한국사람

 

지난 2월, 독일에도 어김없이 '설날'은 찾아왔다. 이곳 자브리켄 시와 인근에 사는 한인 가족들이 KIST유럽연구소에 모였다. 한글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의 세배를 받고, 부채춤 공연을 보고, 한국음식을 먹으며 떠나온 고향과 부모, 친지를 그리는 마음을 달랬다.

 

한인회 모임에는 한국에서 간호사나 광부로 오신 분들도 계신다. 외화벌이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까지 왔던 청년과 아가씨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대부분 현역에서 은퇴하셨다. 그 분들을 만나보면 한국에서 계속 살던 분들과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을 떠나 살아온 세월만큼 독일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설날 같이 우리 고유의 명절을 맞이하는 마음이 같다는데서 동족임을 실감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은 좀 더 다르다. 부모를 따라 왔지만 어른들이 가지는 설날에 대한 감회를 이 아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독일 사람들은 교통법규를 참 잘 지킨다. 또한 다른 운전자를 위해서 배려하고 양보하는 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내가 출퇴근하는 길옆에 건물공사 때문에 몇 개월째 한쪽 차선을 막아놓았는데, 출퇴근 시간에 많은 차들이 붐비는데도 차량 운행이 별로 느려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이 양보를 잘 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깜박이면 상대방이 먼저 지나가라는 의미다. 그리고 독일 운전자들은 좁은 도로에서 마주치게 되면 어김없이 먼저 길을 비켜준다.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쉽지 않은, 단순하지만 중요한 이런 것을 겪어보면 이 나라 사람들이 선진 국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내가 본 독일은 한마디로 근검절약의 나라이다. 독일의 국내 총생산은 약 3조6000억 달러로 한국보다 3배 이상 많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약 4만4000 달러로 한국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그럼에도 독일 사람들이 부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여자들의 수수한 옷차림, 단출한 음식문화, 조용한 밤 문화, 철저한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등을 보노라면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독일에 와서 전기, 물을 아껴 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한국보다 비싸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절약 정신이 투철한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독일 역사를 보노라면 이런 성향이 처음부터 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땅에서 발발한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로 바뀐 듯 하다. 이들이 질서와 규율을 잘 지키는 것을 보면, 필요하면 언제든지 조직화 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들이 다양한 모양의 자갈돌이라면 독일 사람들은 규격화된 벽돌이라는 느낌이다. 국가적인 요구가 있으면 언제든 모여서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재독 한국인들에게서도 독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독일에 오래 산 사람일수록 그런 면이 강하다. 그런데 개인에게 있어서는 독일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섞이면 좋은 면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마치 한국말과 독일말을 동시에 잘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하지만 이런 사람들 여럿이 모여서 조직이 만들어지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독일적인 한국사람과 한국적인 독일사람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이 생긴다. 완전한 한국인도, 완전한 독일인도 아닌 것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인 것이다.

 

KIST유럽연구소는 독일 국적의 사람이 제일 많다. 한국 사람들도 대부분 현지에서 뽑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연구소는 독일에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런 외부적인 조건으로 보면 영락없이 독일계 연구소이다. 하지만 최고 경영자인 소장은 한국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고, 또 연구소 예산의 대부분은 한국 정부에서 지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연구소가 독일 연구소로 커나가야 할지, 한국 연구소로 커나가야 할지 그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연구소의 미래를 위해 아주 중요하다.

 

이 연구소를 독일에 설립한 목적은 독일 현지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독일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배우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런데 양국의 과학기술 문화는 너무 많이 다르다. 일례를 들면, 독일 연구소에서는 한국과 달리 연구자들이나 연구기관에 대해 매년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독일 연구소는 호봉제를 기본으로 월급을 지급한다. 즉 연구 성과에 상관없이, 경력과 근무연수에 의해 월급이 정해진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연구자의 성과를 매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성과급이 달라진다.

 

KIST유럽연구소 직원들 대부분은 독일 문화에 익숙해 있고, 독일식 연구방법을 따르고 있다. 그렇지만 연구소는 한국 정부나 상위기관의 요구, 즉 한국식 연구방법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이빨이 맞지 않는 두 개의 톱니바퀴가 물려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결코 좋은 연구 성과가 나올 수 없다.

 

빌 게이츠는 이런 상황의 해결책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한 글 '가장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다'에서 그는 해외 빈민들을 원조하는 일이든, 학교에서 학생을 교육하는 일이든, 목표를 세우고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그 성과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그것을 피드백 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만 목표 달성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빌 게이츠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과학기술분야의 성과를 측정(즉 평가)하기 위해 이미 오래 전에 성과지표라는 것을 정하였다. 그리고 평가결과를 해당 연구자나 기관에 피드백 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은 꽤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연구소 운영은 몇 가지 성과지표로써 나타내기 어려운 면이 있다. 특히, 연구에서 실패의 경험은 실패가 아니라 다음 번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재의 실패를 실패로 단정해버리는 평가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연구의 성과에 대해서는 현재 시점에서 아니라 미래 시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당장 판단하기 어려운 바로 이런 요소들 때문에 빌 게이츠도 정확한 측정을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했을 것이다.

 

KIST유럽연구소는 한국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연구소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국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되려면 독일이라는 환경에서 성공해야 하는데, 성공하려면 독일적인 요소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곳 상황에 맞는 '성과 측정과 피드백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제도로써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운영의 묘를 발휘해서 해결해야 한다. 정말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한국인의 장점과 독일인의 장점이 결합된 성공적인 연구소 모델을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

 

 

 

  •  대한민국 4.0시대를 여는 시기로 성숙된 의식과 시스템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에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그 발전의 바탕이 되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생생하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 소장은 독일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편지나 일기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 이호성 소장은 KAIS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 17년 동안 시간·주파수 표준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펌핑 세슘원자시계를 개발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2003년 이후에는 표준연의 주요보직을 맡아서 후배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에서 나노·융합단장으로 2년간 근무한 바 있습니다.

 

  • 2012년 9월 KIST유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해 한국과 유럽연합을 잇는 가교역할을 위한 국제협력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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