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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독일의 겨울 그리고 봄

 

'독일에서 겨울을 지내봐야 독일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이곳에 와서 여러 차례 들었다. 겨울이 지난 시점에서 되돌아보니 마치 길고긴 터널을 빠져 나온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독일의 겨울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겨울철의 혹독한 추위를 '살을 에는 추위'라고 한다. 건조한 날씨, 영하의 기온에 바람이라도 불면 추위는 살갗을 트게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긴 듯하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많은 양은 아니지만 겨울철에 비가 자주 내린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대부분 구름이 두껍게 끼어있어서 햇빛을 보기가 어렵다. 기온은 그렇게 낮지 않지만 습기를 머금은 추위는 스멀스멀 살 속으로 기어들어온다. 이 습한 추위는 '뼈 속까지 시리게' 하는 것 같다.


 

독일에서 첫 겨울을 보내면서 느낌이 다른 추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추위가 단지 기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독일은 위도가 높아서 겨울철이 되면 밤이 많이 길어진다. (반대로, 여름철에는 낮이 많이 길어진다.) 이곳 자브리켄의 위도는 북위 49.2도이고, 수도 베를린은 52.5도다.


 

아시아 대륙과 비교해보면, 한반도의 최북단은 43도이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가 47.5도이다. 독일의 주요도시들은 우리나라 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철이 되면 밤의 길이가 하루의 3분의 2를 넘는다. 긴긴 겨울밤은 심리적으로 추위를 더 심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독일 사람들이 제일 많이 마시는 음료는 무엇일까?  보통 물이나 맥주일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 답은 커피다. 독일인 한 사람당 1년에 약 190리터의 커피를 마신단다. 하루에 평균 0.5 리터가 넘는 커피를 마시는 꼴이다. 독일 사람들이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시는 이유는 바로 이 날씨 때문인 것 같다. 특히 겨울철 음산하고 우중충한 날씨에 기분전환을 위해서는 커피가 필수적이다.


 

이곳에 살다보니 나도 한국에서는 거의 마시지 않던 커피를 매일 마시게 되었다. 한약처럼 진한 독일 커피를 독일 사람들만큼 마신다. 독일에서는 커피가 기호품이 아니라 생필품이다.


 

독일에서 겨울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시점은 서머타임제(일광절약시간제)가 적용되는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겨우내 출근시간이 어둑새벽이었는데 점점 환해지는 것을 보면 밝은 빛을 그냥 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그래서 시계바늘을 한 시간 앞으로 돌려서 하루를 더 일찍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차를 주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별로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긴긴 겨울밤에 대한 반작용이 아닌가 싶다.

 

 

KSIT 유럽 연구소 인근에 벚꽃과 튤립이 만개하며 봄 소식을 전했다. 화사한 아름다움에 끌려 카메라 셔터를 '찰칵'

 

 

 

4월 중순이 되면 수선화, 튤립, 개나리, 목련, 벚꽃이 피어나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올 겨울은 다른 해보다 유난히 춥고 길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날씨가 풀린 후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꽃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피어났다. 어둡고 긴 터널 속을 지나 밝은 곳으로 나오는 순간 꽃이 만개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독일의 봄은 이렇게 갑자기 다가 왔다.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신호가 있다.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사람들이 테라스나 정원에 나와서 고기를 굽는다. 휴일이면 온 동네가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하다. 어떤 집에서는 정원에서 파티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독일에 와서 한국에서는 흔한 고기집(숯불에 고기를 구워 파는 식당)을 보지 못했다. 그 대신에 각자 집에서 그릴로 고기를 굽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되는 5월의 첫째 날은 노동절이다. 독일은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적 제도가 한국에 비해 강하다. 독일 노동법에는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2년 이상 고용하려면 반드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법규가 있다.


 

그래서 2년이 넘기 전에 그 사람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것인지 내보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일단 정규직이 된 사람은 불법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업무 실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내보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규직을 뽑는 조건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KIST유럽연구소에서 지난 16년 동안 근무하다가 나간 사람들의 평균 근무 기간이 약 20개월이었다. 한국의 출연연구기관과는 달리 인력의 유동성이 너무 큰 것이다. 이런 짧은 기간 동안에 우수한 연구성과를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독일 노동법 때문에 KIST유럽연구소가 인력활용에서 겪는 어려움이다.


 

반면, 독일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독일의 연구기관은 인력채용에 있어서 '학술분야 한시 고용법'이라는 특별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이 법에 의해서 박사후연수원(포닥)을 계약직으로 6년간 한 직장에서 활용할 수 있다. 6년이 지난 뒤에 이 사람의 업적을 평가하여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인지 결정한다. 이 덕분에 독일 연구소는 인력 활용에 있어서 KIST유럽연구소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KIST유럽연구소는 독일에 있지만 독일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소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 특별법 적용을 받으려면 경영권을 독일정부로 넘겨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 연구소가 아니라 독일 연구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환경조건에 있기 때문에 우수한 독일 연구소가 우리 연구소 발전에 있어서 롤 모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조건에 맞는 연구소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독일에 정착한 한국 김밥집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한국 부인과 독일 남편이 김밥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파는 김밥은 현지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변형되어서 한국의 김밥과는 좀 다르다. 한국에서는 김밥이 싼 음식이지만 이곳에서는 고급 음식이다. 가격도 한국에 비해 열배쯤 비싸다. 그런데도 손님들이 많다. 독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더 많다.  바로 이런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 규모는 작더라도 한국 음식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면서 현지에 적응한, 고급 (질적으로 우수한) 김밥집 같은 연구소 말이다.


 

커피든, 서머타임제든, 노동법이든 독일에서는 이런 것들이 그들의 필요와 조건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 발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 잘 나간다 하여 우리나라에서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선진국을 무조건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 맞도록 키워나가야 한다. 이것이 '선진국 추격형'에서 '세계 선도형' 연구소로 발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것이다. 또한 새 정부가 주창하는 '창조경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핵심 정신일 것이다.

 

 

  • 대한민국 4.0시대를 여는 시기로 성숙된 의식과 시스템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에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그 발전의 바탕이 되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생생하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 소장은 독일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편지나 일기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 이호성 소장은 KAIS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 17년 동안 시간·주파수 표준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펌핑 세슘원자시계를 개발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2003년 이후에는 표준연의 주요보직을 맡아서 후배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에서 나노·융합단장으로 2년간 근무한 바 있습니다.

     

    • 2012년 9월 KIST유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해 한국과 유럽연합을 잇는 가교역할을 위한 국제협력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