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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아우들은 연구에 매진하시게…형님들이 그렇게 만들어주겠네”

 

 

‘장래희망’이란 단어를 채 이해하기 전부터 꿈은 늘 과학자였다. 한 번도 다른 길을 상상해보지 않았으니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처음으로 진로를 고민한 건 대학입시를 앞두고. 너무나 매력적인 물리학과 취직이 잘 된다는 화학공학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때는 전쟁으로 온 나라가 피폐해져 있던 1958년. 먹고 살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졸업도 하기 전에 현재 효성그룹의 전신인 한일나일론에 발탁됐다. 거기서 합성섬유 기술자 1세대로서 나일론 공장을 짓고 실제 가동하는 것까지 진행했다.

그렇게 3년을 보낸 후,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은 ‘공부를 더 하고 싶다…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 뿐. 조교로 일하며 등록금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이용해 미네소타대학(University of Minnesota)으로 미국 유학을 갔다. 힘든 학위과정을 마치고 휴스턴대학(University of Huston)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던 중, 1972년 한국의 은사님에게서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KIST에 화학공학 부서가 만들어지니 돌아와서 연구하라는 내용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곧장 비행기를 탔다.

“당시 연구실 바닥은 콘크리트 그대로에 철제의자였지. 연구원 둘이 앉아 있다가 외국에서 유명한 사람들 오면 같이 앉아있기도 했어. 지금과 비하면 정말 초라한 연구실이었지만 KIST에서 일한다는 긍지는 지금과 비할 수 없었어. 그때는 모든 지식인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나라가 먹고 살려면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과학기술이라고 강조했으니까. KIST는 이같은 온 국민의 바람을 실현한 것이어서 모두가 귀하게 여겼고 존경을 했지. 통행금지에 걸려도 KIST 다닌다고 하면 그냥 보내줄 정도였어. 그리고 내가 하는 연구는 모두 대한민국에서 최초가 되었으니까 그 자긍심도 컸지.”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나이, 종심(從心)을 넘어 망팔(望八)에 이른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KIST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국가과학기술위원, 산업기술연구회 이사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 등 과학기술계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지만, 여전히 “KIST 전 원장으로 불리는 게 가장 영예롭다”는 박원훈 전 원장이다.

현재도 아시아과학한림원연합회 회장과 과학기술나눔공동체 운영위원장, KIST연우회장 등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박 전 원장을 만나 그의 어제와 오늘을 반추해봤다.


세계적 물리학자 꿈꿨으나 ‘구공탄박사’로…

“한 우물 못 판 것 아쉽지만 국가 당면과제 해결에 긍지 느껴”

- KIST 연구원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하다.

“국가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고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긍지가 있다. 조선·기계·전자·철강 등 KIST 연구원이 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 또 당시 KIST는 국가의 두뇌였기 때문에 과학기술 관련 일은 KIST로, 경제 관련된 일은 KDI(한국개발연구원)에서 해결했다. 청와대는 온갖 사기적인 아이디어도 모두 들어가는 곳이다. 어떤 아이디어가 들어오면 당시 오원철 경제2수석이 KIST 소장에게 자료를 보내 검증을 부탁했다. 그 중 에너지 관련된 것은 나에게 왔는데, 밤새 조사하고 분석해서 2장 내외의 차트로 만들어 오전 7시까지 청와대로 보내 오 수석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일에서 응급처치 능력이 필요했다.”

- 모든 것이 ‘대한민국 최초’였지만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기초연구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우리나라 산업발달을 위해 모방기술을 개발하는 연구를 많이 했다. 아쉬움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 가지를 오래 할 수가 없었다는 거다. 연구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1973년 석유파동이 일었다. 당시에는 석유의 대체에너지로서 지금과 같은 신재생에너지를 할 수는 없었기에 석탄연구를 맡아서 했다. 누가 연탄연구를 하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사회적 요구기에 했다. 당시 내 별명이 ‘구공탄박사’였다. 이후 대기오염 등 환경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그쪽을 하게 됐다. 환경과 에너지를 왔다 갔다 했다. 학문이라는 것은 깊이가 있어야 하는데 한 가지를 오래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연구소가 자리를 잡자 후배들이 늘어나며 연구자보다는 관리자의 역할을 해야 했다.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연구자로서는 불행이다. 누군가 내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국가연구프로그램 관리한 것 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우리나라 에너지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큰 보람이지만, 과학을 좋아하고 물리학도를 꿈꿨던 개인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 5년간 KIST를 떠나있었다.

“성균관대학교 재단의 상임이사로 2년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때 출연연구소 통폐합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연구원들이 TFT를 구성해 우리가 바라는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로 옮겼으나 학교 행정 일이 맞지 않았다. 늘 KIST로 돌아오고 싶었다. 이후 현재 에너지기술연구원의 운영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에너지연에서 3년을 지낸 후 다시 친정으로 왔다.”


- KIST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는 무엇인가.


“1996년에 원장이 되었는데 당시 연구회가 만들어졌다. KIST를 산업기술연구회에 분류하려는 것을 총리실에 면담까지 요청해 찾아가서 기초기술연구회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애원했다. 당시 다른 출연연구원이 많이 설립돼 산업기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KIST는 선도 연구기관으로서 원천기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산업기술의 주창자인 故 최형섭 박사도 KIST는 기초로 가야한다고 하셨다. 당시 김종필 총리가 KIST의 설립과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해줬다. 주변에서 눈총을 많이 받고 고생도 했지만 그때 방향을 잘 잡은 것 같다.”

- 원장 재임 시절 출연연의 역할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출연연은 정부의 대리자다. 산·학·연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우리밖에 없다. 다른 국가는 모두 산·학만 있다. 이유는 우리나라가 산업화 초창기 산업체와 대학이 모두 연구능력이 없어서 초고속 산업개발을 위해 출연연이 산업체와 대학의 역할까지 모두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원장 부임 당시 KIST 설립 30주년이었는데, 그때는 산업체와 대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그들과 경쟁하지 않고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했다. 지금도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을 생각하고 역할을 찾아가야 한다.”


“원천기술 개발에 장기간 매진하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선배들의 책임이다”

- 현재 KIST연우회 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KIST연우회는 1980년대초에 친목단체로 만들어졌다. 자격을 가진 사람은 4500명 정도 된다. 하지만 회장을 맡아보니 KIST의 성격과 회원들을 볼 때 단순히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맞지 않은 것 같아서 사업을 구상했다. 현재 진행 중인 ‘박정희 과학기술기념관 건립’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대통령으로서 성공적으로 실시한 정책에 대한 내용도 전시하고 국제회의장 등을 갖추고자 한다. 모금활동을 진행 중인데 현재 2억원정도 모였다. 100억원을 마련해 2016년 KIST 50주년에 맞춰 개관하는 것이 목표다. 현재 KIST 연우회는 긴밀하게 잘 진행이 되고 있다. 전 원장단과 현 원장이 자주 모여 자문회의도 개최한다. 연우회를 통해 현재 KIST에 있는 사람들이 긍지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


- 과학기술나눔공동체 운영위원장도 맡고 있다.

“국가발전에 있어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가 옛날 같지는 않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문제가 된 것도 오래 됐고. 부모들이 자식이 과학기술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앉아서 외칠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모든 사회적인 의사결정 사슬의 맨 꼭대기는 정치지만, 정치를 뒷받침해주는 건 사회 여론이다. 국가정책에 과학기술이 잘 반영되도록 하려면 사회에 대한 공헌을 하고 사회에 요구를 해야 정치가 그걸 들어준다. 현재 과학기술계도 나눔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공동체에서는 어떤 나눔운동을 하고 있는지 파악해서, 빈 구멍이 있다면 채워주고 전반적인 홍보도 하려고 한다.”

- 과학기술계 큰 어른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제 과학기술계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 나는 그분들이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나이든 사람이 경험은 있지만, 고집이 세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선배들은 욕심내지 말고, 젊은 사람들이 하기 힘든 말들을 대변해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현재 젊은 연구원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들볶이는 것 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20년은 무조건 연구실에서 자기 연구를 해야 한다. 30~40대에는 연구실에서 열정을 불사르며 장기간 원천기술 개발에 매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선배들의 책임이다.”

-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해달라.

“한동안은 출연연구소의 여건이 대학교수들하고 차이가 많이 났지만 이제는 좋아졌다. 그리고 대학도 몇몇 사립대학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지 평균적인 교수들과 비교하면 KIST의 대우는 나쁘지 않다. 그러니 자기 일에 매진했으면 좋겠다. 또 KIST에 있다는 것은 엘리트라는 의미다. 엘리트의 임무는, 자기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나 국가에 대한 공헌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한다. 연구를 통해 축적한 것들과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사람들과 나누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