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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cle KIST

세계인 주목 88올림픽 과학기술 "KIST 손에서 탄생했죠"



[인터뷰]KIST 1세대 연구원 '성기수 박사'…정보통신 R&D 선두주자

전화요금·대학예비고사 채점·올림픽 경기정보 등 '업무 전산화'

'KIST 슈퍼컴 도입' 기초연구여건 최고 수준으로

"KIST 만남은 필연…모든 것에 감사해"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처음만난 컴퓨터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것이었다. 공학적 수치를 탁상용 계산기로 몇 일간 두들긴 한 연구자의 수고를 허무하게 할 정도로 IBM 7090컴퓨터는 수천수백배의 작업능률로 그를 매료시켰다.


"컴퓨터가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한국에도 보급하는 일이 시급하다."


국내 봉급의 10배, 미국 잔류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한국에 가야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 산업발전을 위해 숙련공을 키우려면 10년 이상이 걸리지만 컴퓨터 하나면 인재양성은 물론이요 민간기업이 손대기 어려운 프로젝트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6.25전쟁을 겪으며 비참한 생활을 했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버드 역사상 초고속 학위취득을 한 과학기술계 유망주 성기수 박사는 그렇게 KIST 1세대 연구원이 됐다. 


성기수 박사는 KIST 전산실(시스템공학연구소)을 이끌며 국내 첫 컴퓨터를 도입하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업무전산화를 주도하는 등 한국 생산성 혁명을 일으켰다. 


한글 입출력 시스템, 병원관리 종합시스템, 서울시 전화요금관리 자동업무화, 여권과 주민등록 전산화 시스템, 올림픽 경기정보 시스템 등 모두 그가 이끌던 연구소 성과들이다. 


"당시 컴퓨터를 단순 빠른 계산기로만 생각하더군요. 과학기술연구 수치계산에 활용하면서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컴퓨터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줬고, 그 결과 KIST가 많은 대형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됐습니다."   


KIST가 홍릉에 자리를 마련하기 전 종로 5가 변두리에서 임시 사무소를 운영할 때부터  28년동안 KIST에서 연구활동을 한 성기수 박사.


인생의 갈림길에서 KIST에 올 수 밖에 없는 선택을 했던 지난날이 감사하다는 그를 만나봤다. 



하버드에서 처음 만난 컴퓨터 “국내 도입 시급, 귀국 지체할 수 없었다”


성기수 박사는 1953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해 1954년 서울대 화공과에 입학했다. 화공과를 선택한 이유는 전쟁 후 모든 물자가 귀한 우리나라에 필요한 산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50년대 국산 비누를 쓰다 미국산 비누를 쓰고 깜짝 놀랐다. 우리도 이런걸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비누, 치약 같은 생필품과 비료, 농약 등 직접 관련이 있어보이는 과가 화공과였다. 화학산업을 해야한다고 생각해 지원했다." 


화공과는 인기학과로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우수인재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났다. 유황과 황산냄새만 맡아도 눈물과 콧물이 멈추지 않았다. 화학실험이 체질 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그 때 만난 교우가 박철이다. 박철 교수는 전 NASA 연구원과 일본 도호쿠 교수와 KAIST 교수 등을 지냈다. 그는 성기수 박사에게 조선항공공학과 전과를 권했다. 그 역시 좋아하고 자신있었던 수학을 더 많이 공부할 수 있어 전과했고, 전과 후 그는 수학자 박경찬 교수의 눈에 띄어 조교로 취직해 4학년 1학기때까지 활동했다.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두고 취직, 병역의무, 진학이라는 갈림길에 섰다. 대부분 그랬지만 우리나라 사정 상 조선항공공학과를 졸업해도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대학원 준비를 하는 도중 공군장교후보생 시험을 치룰 기회가 주어졌다. 장교로 임관되면 군무와 대학원 학업이 가능한 상황이니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관생활을 하며 그는 항공역학과 초음속공기역학 등 생도를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대학원생 신분으로 서울공대 캠퍼스에서 꾸준히 학업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방부과학연구소에서 자체 제작한 신형 로켓 탄도를 계산해달라는 공식 요청을 받았다. 요청은 성기수 박사와 박철 박사가 맡았다.


"로켓탄도를 미리 계산해 분사가 끝난 로켓이 어디를 어떤 방향으로 얼마의 속도로 날게되는지 알아내는 일이었다. 탄도가 너무 멀리 발사되어도 가까이 발사되어도 안 되기 때문에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는 연구 시작 두 달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로켓 탄도 근사공식을 얻어냈다. 관련 논문은 미국 항공우주 과학학술지에 실렸다.


그 즈음 소련이 세계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닉 1호를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은 미국과 서방국가를 충격에 빠뜨렸고 전 세계 우주항공 전문가들을 미국에 모으는 계기가 됐다.


그는 논문을 계기로 하버드에서 유학을 전폭 지원하겠다는 입학허가서와 장학금 증서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에서 그는 2년 만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땄다. 하버드 역사상 초고속 학위취득이다. 


성 박사가 초고속 학위취득을 해야만 했던 것은 1962년 '해외에 나가있는 현역 군인들은 체류기간 2년을 넘기지 말고 모두 귀국하라'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회의 편지 때문이기도했다. 꼼수를 쓰면 귀국하지 않고 영주권을 받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기계공학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국가경제발전에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라 생각, 결국 조국을 선택했다. 


귀국을 앞둔 63년 박사후과정 연구원으로 생활하며 그는 처음으로 컴퓨터를 만났다. 연구실에서 작업하던 박사학위논문을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응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과정에서다.


"우주선의 다양한 비행속도, 날개모양, 자장의 강도, 이온층의 전기 전도도 등을 계산하려고 하루종일 전동탁상계산기를 두들겼다. 동료가 옆방에 가면 더 좋은 계산기가 있다해서 가보니 하늘색 옷장 같은 대형박스가 여러개 방을 채우고 있었다. 하버드대 전자계산소였다."


그가 본 것은 IBM사의 제2세대 컴퓨터 'IBM 7090'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군부대 외 컴퓨터를 보유한 곳이 없었다. 


그는 "컴퓨터를 배워서 프로그램으로 계산을 했는데 계산뿐 아니라 그 과정을 다 기억하고 있더라. 컴퓨터를 행정이나 경영, 제조과정 등에 연결하면 숙련공 없이도 우리도 자동차를 만들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런 생각이 드니 귀국을 지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교수 제의받았지만 ‘KIST 선택’


1963년 7월 귀국한 그는 유학 전 근무지였던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소속 항공역학 교관으로 복귀했다. 9월부터 서울대 공과대학 조선항공공학과와 문리대, 대학원 물리학과 등에서 강연을 하며 컴퓨터의 중요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컴퓨터 도입의 꿈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기술개발공사에서 기술자문으로 잠시 일하던 적이 있는 그는 1966년 한국기술개발공사가 최초로 컴퓨터를 도입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에 앞서 IBM 직원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며 여러 컴퓨터 관련정보를 얻고 있었다. 한국기술개발공사가 컴퓨터를 도입하면 그가 전산실을 맡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지만 한국기술개발공사 측 간부들이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기 이른다.


도입무산으로 실의하고 있던 67년 초 어느 날 그는 미국 대학교수제의를 받았다. 1년만 일하고 오면 한국에서 10년은 살 수 있는 봉급, 가족들의 비행기표까지 모두 마련된 상황에 몸만 가면 됐다. 


그 와중에 성 박사는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에서 KIST컴퓨터기술고문으로 파견 나와있던 에반스를 만났다. 바텔기념연구소는 KIST의 미국 측 기술용역자문연구소로 한국에 과학기술분야 전문가 포함 조사단을 파견했었다.


하버드 대학 유학시절 안면이 있었던 에반스와의 만남, 그리고 KIST 설립에 대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접한 그는 KIST라면 정보통신 역사를 쓸 수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컴퓨터를 구입해 행정 경영, 연구 등에 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미국 교수 제의를 거절했다.


“KIST가 홍릉에 세워지기 전 종로 5가에 임시 사무실이 있었죠. 그곳에 직접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습니다.”


면접 후 임시연구원으로 채용된 성 박사는 6개월 동안 동료들과 한국의 중장기 컴퓨터 수요조사를 통해 한국에 상당한 컴퓨터 수요가 있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한국의 전산수요를 예측하는 조사작업은 바텔기념연구소가 직접 실시했던 16개 분야 산업실태 연구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 결과로 KIST는 상당한 수요에 대비해 전자계산실을 설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KIST 전산실을 꾸렸다. KIST전산실장으로는 성기수 박사가 내정됐다.


KIST는 1969년 초 미국 컨트롤데이터사로부터 초대형컴퓨터 CDC 3300을 도입했다. 한국 사정에 맞는 컴퓨터를 들여오기 위한 평가작업에서 청와대 과학담당비서관이 자신이 지정한 컴퓨터를 사지 않으면 돈 한 푼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도입비로 책정됐던 70만 달러에 대한 전액 삭감판정이 내려져버렸지만 일시불 대신 5년간 렌털하는 방식으로 CDC 3300을 도입했다. 


"1969년 6월 1일 컴퓨터가 인천항을 통해 홍릉단지로 들어왔다." 


하버드 대학에서 컴퓨터를 구경한 지 6년만에 그는 다시 만난 컴퓨터를 만났다. KIST가 들여온 CDC 3300은 한국에 도입된 12번째 컴퓨터지만 다른 컴퓨터와 달리 과학기술계산전용으로 제작됐으며, 당시 한국이 도입한 컴퓨터 가운데 최대용량이었다.


CDC 3300은 대입예비고사 자동채점과 서울시 전화요금관리업무 자동화 등 업무전산화 시작을 알렸다. 대형프로젝트를 KIST가 맡아 하는 사이 CDC 3300의 활용률 급상승으로 KIST는 1년 후 최신기종 컴퓨터 사이버 72-14를 도입했다.


공공부문 예산 규모 몰랐던 70년대, KIST 전산시스템으로 관리시작


"제일 기억에 남는 연구는 정부 예산업무 전산화다. 이후 컴퓨터가 답안지를 읽어 자동 채점하는 대입고사 자동채점, 서울시 전화요금관리 전산화, 88 올림픽 자동채점시스템 등이 있다. 서울시 전화요금관리 전산화 경우는 처음으로 컴퓨터가 인쇄한 요금고지서를 국민들이 받아볼 수 있어 반응이 대단했다. 시스템 전산화는 KIST에 많은 관련 프로젝트들이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KIST전산실에서 성기수 박사는 1969년부터 1975년 말까지 약 100여건의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중 70%가 전산화를 위한 연구였다. 


KIST가 처음 맡은 프로젝트는 정부 예산업무 전산화다. 예산업무가 불합리하고 불투명하게 이뤄지는 것을 고쳐보자는 건의로 시작됐다. KIST 전산실은 곧바로 연구작업에 착수했다. 70년부터 77년까지 6년에 걸쳐 3단계로 나눠진행됐다.


먼저 KIST와 경제기획원 사이의 데이터 통신망을 개설했다. 지금이야 무선 인터넷으로 바로 연결하면 된다지만 당시에는 KIST 컴퓨터와 경제기획원 예산국에 설치한 컴퓨터를 연결시키는 일 자체만으로도 큰 프로젝트였다. 그는 “두 컴퓨터를 연결한 이유는 KIST에서 처리한 예산업무를 경제기획원에서 직접 받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컴퓨터 라인 개통 후 각 부처에서 올라온 예산요구서로부터 예산사정에 필요한 각종 정책자료를 도출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됐다. 이어 각 예산사정 단계마다 예산당국이 필요로 하는 정책자료를 즉시 검색, 출력해주는 프로그램 개발이 완료됐다.


또 각 국회 의결을 거친 예산 집행과 관련된 업무분야를 집중 전산화하는 작업과 공공부문의 재정상태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예산시스템이 구축됐다.


이 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공공부문 예산규모를 따지는 일이 불가능해 그만큼 예산낭비가 불가피한 상태였다.


각 부처가 컴퓨터를 도입하기 어려웠던 시절, KIST 전산실 컴퓨터를 이용하는 데이터통신 방식 전산화는 적절한 대응이었다. 프로젝트의 성공 이후 정부의 컴퓨터 인식 확산 성과와 체신부 전화요금고지서 전산화, 전매청 업무전산화 등도 잇따라 성공했다. 전국적으로 KIST에 일감이 쏟아지는 계기이자 한국의 경제발전과 정보산업에 획을 긋는 주요 기회가 됐다. 


88올림픽 전산화시스템, 한국 과학기술 우수성 전 세계 알리다.


수영경기에서 선수들의 손이 터치패드에 닿는 순간 정확한 기록과 순위가 나타나는 시스템이 있다. 실시간으로 컴퓨터에 입력돼 전광판에 보여지는 이 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한 것이 KIST다.


88올림픽을 유치한 당시 KIST는 올림픽전산화 시스템 개발과 운영을 책임졌다. 다양한 국가의 참여와 많은 경기가 치러지는 탓에 소프트웨어 명령갯수가 100만개 넘는 코드를 만들어야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 같은 코드를 만든 전례가 없어 불가능하니 해외 기술을 들여와야하는 것 아니냐는 쪽으로 기울었었다.


미국에 용역을 주면 소프트웨어만 500만불, 그러나 KIST는 자발적 기술개발로 10분의 1의 사업비로 성공시키면서 세계로부터 가장 진보된 올림픽 전산화 시스템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찬사를 받기까지는 KIST 전산실의 불철주야 없이는 불가능했다.


성기수 박사는 외주로 기운 용역을 반대하고 노태우 올림픽조직위원장을 찾아가 국내에 기회를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자 1983년에 인천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서 능력을 보이면 고려해보겠다는 답변을 받고 다시 KIST로 돌아왔다.


"시간은 겨우 3개월, 예산도 많이 부족했다. 인천 여관을 통째로 얻어서 젊은 사람들과 철야로 작업을 했다. 우리는 종목마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경기장 데이터를 KIST로 연결해 전산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불과 3개월 만에 개발된 인천체전 전산화 시스템에 만족한 노태우 위원장은 올림픽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KIST가 올림픽전산화 시스템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전적으로 맡겼다.


스포츠는 0.001초를 다투지만 기술이 없어 사람이 직접 시간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KIST는 이를 전산화해 터치패드 기록을 자동입력, 순위를 나타내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선보였다. 또 전화선을 구리선이 아닌 광케이블로 깔아 전세계 언론사들이 자유롭게 컴퓨터를 쓰고 기사를 게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88올림픽전산화 시스템은 국내 소프트웨어의 자신감과 프라이드를 심어준 계기가 됐다"며 "중국이 베이징 아시안게임 준비하는데 우리 시스템을 기술이전했다"고 말했다.


올림픽 개최 이후 KIST는 국내 최초로 슈퍼컴퓨터'크레이지 2S'를 보유하게 됐다. 국내 슈퍼컴 보유에 낭비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그는 슈퍼컴퓨터가 과학기술계의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1983년 슈퍼컴 도입에 대한 보고서가 과학기술처에 의해 타당성을 받은지 5년만에 겨우 일군 쾌거였다.


슈퍼컴 도입은 그야말로 성공적이였다. 전국 대학과 연구소 등에서 슈퍼컴을 기초연구에 활용하고 싶다고 나서 3달만에 포화상태가 된 것. 슈퍼컴은 바이오, 토목설계, 항공역학, 생물 등 여러방면에서 활용되며 질 좋은 국내기초연구논문을 도출하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슈퍼컴의 능력을 맛본 산업체도 마찬가지였다. 자동차 설계 후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매번 비싼 자동차를 깨부수지말고 슈퍼컴을 이용해보라고 권유하자 기아자동차에서도 슈퍼컴을 써서 연구하겠다고 나서며 자체적으로 컴퓨터를 활용하기 까지 했다.


또 1989년 태풍 '베라'의 진로를 정확하게 예측해 일기예보 정확성을 한층 높게 끌어올렸다. 이 외에도 3차원기반 한반도 지도제작과 국토종합개발, 군사전략수립결정에서 결정적인 일을 하고 B형 간염 예방 약 및 항암제개발, 원자력발전소 안전성 분석 등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전자교환시스템 개발의 초석을 다져 1인 1가구 전화시대를 여는 등 한국의 통신기술을 세계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은퇴 후에도 천상과학자 “KIST는 필연”


KIST에서 28년간 연구생활을 한 성기수 박사는 동명정보대 초대총장과 세계사이버기원 초대 대표이사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위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은퇴했다.



최근에는 집 앞 산을 오르며 바둑을 두는 것이 취미인 그는 스마트 밴드를 통해 매일 건강을 체크하고 취미를 살려 인터넷 기반 바둑사이트 세계사이버기원을 설립 기획하기도 했다. 은퇴한 지금까지도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가까이 하는 천상 과학기술자다.


최근 KIST를 찾은 것이 2년 전이라는 그는 “KIST 본관 1층에 컴퓨터실이, 2층에는 그의 사무실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전산실이 확대돼 시스템공학연구소가 되면서 슈퍼컴퓨터와 함께 대전으로 이사를 했지만 KIST 홍릉본원에서의 긴 연구생활에 추억이 많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KIST에 올 수 밖에 없는 선택을 한 것을 보면 KIST는 인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말하는 성기수 박사. 


그는  "처음엔 우연같았지만 KIST와의 만남은 필연"이라며 "소련만 아니었다면, 조선항공과로 전과하지 않았다면 내가 KIST에 올 수 있었을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게 됨에 감사하고 KIST에서 연구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 또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