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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Talk/사내직원기자

[창의포럼] 야구선수 박철순 (박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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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뉴욕 양키즈의 영원한 캡틴데릭 지터는 아웃이 예상되는 내야땅볼타구를 치고도 1루에 전력질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하루에 3시간 정도 일하는 야구선수에게 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0%로 뛰는 건 어렵지 않다. 단지 노력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지터는 아프지만 팀을 위해서 뛴다는 말은 거짓이라 했다. 지터는 야구선수에겐 아프다와 아프지 않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기에서 뛸 수 있느냐와 없느냐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십 수 년이 흘렀지만 야구에 대한 철학만큼은 데릭 지터를 능가할 불사조 박철순이 KIST를 방문했다.

 

 

 

 

유니폼이 소중했다

 

박철순은 마운드에 등판하는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며 말문을 열었다. 중학교 때 키가 너무 작아서 야구를 그만두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대학 때도 공이 빠른 것 말고는 그저 그런 선수였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유니폼이 소중한 의미로 다가왔다고 했다. 군대 야구팀에서 기량이 급성장해서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그 계기로 미국 프로야구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한국에는 프로야구가 없었고, 미국에 진출해서 성공하지 못할 경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박철순은 자신의 미국진출을 목숨을 건 도전이라고 했다. 자신이 뛰었던 미국구단은 실력이 미달된 선수에겐 라커룸에 훈련수당과 비행기 티켓을 넣은 노란봉투 2장으로 퇴출시켰다. 박철순은 늘 긴장된 마음으로 신중하게 라커룸 문을 열었다고 지난날을 소회했다. 마이너리그 최초 등판의 경험,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미국 마이너리그에서의 재활경험, 그리고 마이너리그 트리플 A까지 진출했던 이야기를 했다.

 

불사조 박철순

 

박철순의 계약조건은 1982년 상반기까지 미국 메이저리그에 등판할 수 없을 경우 일본 프로야구 구단으로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한국에 프로야구가 창설되었고 박철순은 당시 OB베어스의 입단 제의를 받고 국내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프로야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다. 그해 박철순은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불멸의 22연승을 기록하며 소속팀 OB베어스를 원년 우승으로 이끈다. 만약 그의 야구인생이 여기서 멈췄다면 우리는 박철순을 그냥 야구 잘 하는 투수정도로만 기억했을 것이다. 1982년 후반기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경기에 박철순은 선발로 등판해 상대타자의 번트수비를 하다 허리를 삐끗했다고 했다. 사실 그해 OB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진통제를 맞으며 등판을 강행한 박철순의 투혼의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유증으로 결국 그는 허리수술을 받고 길고긴 재활에 돌입하게 된다. 박철순의 수술을 집도했던 미국 주치의는 3년 만에 퇴원하는 박철순에게 앞으로 걸을 수 없다라고 말했지만 걷고 안 걷고는 나에게 달렸다는 말을 남긴 뒤 뼈를 깎는 재활 끝에 그라운드로 복귀한다. 그러나 복귀 후 광고 촬영 중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주시냐!’며 신을 원망해 보기도 했지만 다시 긴 재활을 시작한다. 걷기 훈련을 위해 365일 중 362일 골프장을 찾았고, 걷게 되자 다시 뜀박질을 하고 그라운드로 박철순은 불사조처럼 돌아왔다.

 

야구공을 던진 것이 아니라 혼을 던졌다

 

박철순은 고통스러운 재활을 언급하는 이유를 운동쟁이(박철순은 본인을 낮춰 그렇게 불렀다.)인 자신도 이렇게 아픔을 극복했으니 훌륭한 연구자들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생기면 본인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견디라고 했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힘든 일을 겪다보면 흐트러지고 나약해질 수 있는데 진정한 인내는 그런 참을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라 했다. 자신이 남들보다 정신력이 뛰어나서 재기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투수라는 자신의 직분,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철순이 방송 인터뷰에서 야구공을 던진 것이 아니라 혼을 던졌다고 한 적이 있다. ‘이제 박철순은 끝났다라는 주변의 평가에도 그는 등번호 ‘21’번 유니폼을 입고 다시 마운드에 섰다. 박철순에게 투구 한구 한구는 단순한 야구공이 아니라 불사조처럼 재기에 성공한 본인의 혼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마운드는 어떤 의미였을까? 현대의학도 불가능하리라 판단했던 재활에 초인적 의지를 보여준 것도 마운드에 다시 서고 싶은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선수든 연구자든 어떤 직업인이듯 업에 대한 진정한 절실함이 있다면 그 분야에서 박철순과 같은 이름 석 자를 남길 수 있으리라.